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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Dec 19. 2023

나도 한때는

꼰대도 청춘이 있었다구요.

대학에 합격하고 입학금 통지서를 부모님께 드렸다. 입학금과 등록금포함해서 백만 원 남짓했다. 국립대였고, 인문대여서 다른 과보다 금액이 낮았다. 부모님은 고지서를 한동안 쳐다보더니 어렵게 말을 꺼내셨다

"이번 한 번은 내주겠지만 다음부터는 네가 벌어서 해라. 방을 얻어서 살고 싶으면 허락하겠지만 돈은 줄 수 없다. "

평소에 말이 많았던 아버지는 담배만 피우셨고, 어머니는 미안하다는 듯이 작게 말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할 말이 없었다.


당장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대학생이 된다는 것, 자취를 한다는 사실에 들떴던 나는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내 아르바이트가 시작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할아버지가 하는 가게의 주차요금을 받았다. 그 돈으로 제주시 갈 돈을 모았다. 90만 원짜리 방 한 칸을 친구와 같이 살기로 하고 계약했다. 


커피숍, 비디오방, 호프집, 레스토랑, 입시학원경리, 중간중간 전단지 알바부터 땡처리하는 옷가게 직원까지 대학 4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 틈에서 등록금을 모으고, 사글세를 계산했다. 


승주오빠를 만난 건 시민회관에 있는 음악다방이었다. 당시 시민회관 버스 정류장 앞에는 근처에서 제일 큰 커피숍이 있었는데 그곳이 유명한 이유는 음악을 틀어주는 디제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디제이박스는 대개 계단을 올라가는 곳에 있었고, 투명한 유리가 사방을 두르고 있었다. 디제이 뒤로 가득한 LP판들, 사연을 받는 작은 구멍, 신청곡이 나오면 작은 소리로 환호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쟁반을 들고 커피나 파르페를 날랐다.


시민회관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신제주 레스토랑에서 일할 때도 승주오빠가 있었다. 우리 과 4년 선배인 승주오빠는 학교에서보다 내가 일하는 곳에서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당시 신입생이었던 나는 디제이로 유명했던 승주오빠가 다른 세상 사람 같았다. 그래서 같은 과라는 것도 밝히지 않았다. 


나중에 학교에서 우연히 만났고, 그때 나를 알아본 승주오빠가 아는 체를 해서 인사를 했다. 내계 승주오빠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려운 선배, 음악을 잘하는 국문과생, 잔뜩 겉멋 든 사람, 바람둥이.


얼마 전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내는 대학동기가 승주오빠와 오랜만에 만났다며 소식을 전했다. 오빠에게 내 얘기를 했더니 언제 한번 만나자고 했다며 약속을 잡자고 했다. 나는 갑자기 스무 살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리고 어제 나와 친구와 승주오빠가 만났다. 25년이 지났나. 학교 다닐 때는 참치찌개에 소주를 마셨던 기억도 있지만 우리가 지금 그럴 순 없으니 브런치카페에서 만났다. 먼저 도착해서 기웃거리는데 멀리서 승주오빠가 걸어왔다. 혹시 레마누? 나도 승주오빠도 금방 알아봤다.


신기했다. 시간이 그렇게 지났는데. 분명 내 눈앞에는 50이 넘은 남자가 서 있는데 오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25살의 멋쟁이 선배가 되었다. 오빠의 눈에도 내가 그렇게 보였을까? 자신이 없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내가 마치 승주오빠를 좋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전혀 아니다. 승주오빠는 책을 15권 출간한 유명한 평론가다. 친구는 글을 쓰는 나를 위해 승주오빠를 소개해준 것이다. 혹시라도 내가 도움을 받을 일이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부끄럽지만 승주오빠에게 내 블로그와 인스타, 브런치를 보여줬다. 승주오빠는 자신이 쓴 책과 신문에 나왔던 글 몇 편을 보냈다.


그렇게 우리는 예전 국문과 과방에서 했던 것처럼 문학이야기, 글쓰기등을 얘기했다. 방송국작가인 친구가 이야기를 주도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앉아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명함도 해 놓은 것도 없어서 기가 죽긴 했다. 


그러다 이야기는 갱년기로 옮겨가면서 활기를 띠었다. 역시 사는 게 제일 중요하고, 당장 노안으로 책을 읽을 수 없다는 현실을 얘기하자마자 우리는 확 가까워졌다. 음악과 문학을 사랑했던 국문과의 멋쟁이 오빠는 남성호르몬이 줄어들면서 모든 게 귀찮은 남자가 됐다. 오빠 밥 사 주세요 하면서 선배들을 졸졸 쫓아다녔던 스무 살의 우리는 귀가 잘 안 들리고, 안 아픈 곳이 없는 중년 아줌마가 됐다.


오빠는 몸은 늙는데 마음은 늙지 않으니 괴롭다고 했다. 가만히 보면 예전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나이만 먹은 우리 셋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수다를 떠느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함께 했던 시간이 있고, 현재 공감할 수 있는 화제가 있으면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전 일을 얘기하다 보니 내게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싶어 기분이 좋았다. 우리에게도 빛나던 청춘이 있었다. 들끓는 피로 괴로워하던 그때로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지만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가끔 만나 안부나 묻고 살자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소주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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