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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깊은 밤

나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대단한 것인 양 굴었다

by 레마누

엄마는 9시에 잠을 잤다. 8시 30분부터 졸기 시작해서 9시가 되면 곯아떨어졌다.

잠을 자면서도 텔레비전을 켜 놓았다. 끄려고 하면 듣고 있다며 끄지 말라고 했다. 거짓말.

코 고는 소리가 내 방까지 들렸는데. 뉴스가 끝나서 미니시리즈가 시작된 것도 모르고 잠을 자는 엄마.


나는 엄마의 낮고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부엌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날이 좋은 날은 옥상에 올라갔다. 언제부턴가 검고 깊은 어둠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생각의 생각들. 꿈이니 장래 희망이니 하는 것들은 버린 지 오래됐지만 끈질기게 남아 나를 따라다녔다.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할 일을 먼저 해야 성공한다던 담임선생님의 말씀. 그런데요 선생님. 저는 이제 하고 싶은 일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걸요.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니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모르겠어요. 선생님은 잘 지내고 계신가요? 쉽게 잠들지 못하고 금방 깨어버리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늦은 아침에 일어나 거실에 나가보면 부모님이 허물처럼 벗어놓은 옷가지들이 보인다. 나는 걸음걸이마다 놓여있는 옷들을 집어 들면서 부엌으로 간다.


엄마는 새벽에 일어나 밥을 하고 쌀뜨물로 세수를 한다. 기초화장품을 공들여 바르고, 선크림을 꾹꾹 눌러 바른다. 게으르고 무능력한 큰딸이 먹을 밥을 짓고, 된장국을 끓여놓으면서 한 번도 밭에 가자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엄마는 내게 늘어진 옷을 입지 말라고 했다. 엄마가 가진 가장 좋은 옷을 기꺼이 내주셨다. 집에 있어도 화장하고, 머리도 다듬고. 엄마는 내가 잠시 쉬어가는 손님이 되었으면 했다


서른이 다 되어가는 큰딸이 집에만 있는 것을 동네 사람들이 알았다.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엄마는 그럴 때마다 말을 지어내느라 진땀을 흘렸을 것이다. 알고 있다. 알지만 모른 척했다. 한 보루씩 사다 놓는 아빠의 디스 담배를 하나씩 꺼내 피우며 오만가지 인상을 쓰고 있었을 뿐.


나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대단한 것인 양 굴었다.


가끔 엄마가 자다 깨서 부엌으로 올 때가 있었다.

나는 담배 연기를 날리며 급히 그릇들을 달그락거렸고. 엄마는 잠이 덜 깬 듯한 목소리로 빨리 자라고 했다. 엄마는 천천히 걸었고 내가 급히 숨긴 담배꽁초를 놓치지 않았다.

엄마가 무슨 말을 할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엄마는 물을 한 모금을 마시고 방에 들어갔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눈앞의 일들을 외면하면 아닌 것이 될 수 있을까?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혼자 분개하며 살고 있었다.

스물아홉이었다.

나는 늦게까지 깨어 있었고, 엄마는 텔레비전을 켜놓고 잠을 잤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지는 몰랐지만, 되도록 오래 엄마 옆에 있고 싶었다,

6개월이 지나 결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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