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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Feb 21. 2024

몸의 소리


지난주 토요일 모임에서 만났던 친구가 많이 아프다고 했다. 토요일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내가 다니는 미용실을 묻었는데, 월요일에 생각나 카톡을 했더니 아파서 하루종일 누워 있다는 것이다. 그다음 얘기가 없어 걱정하고 있었는데, 하루 지나 톡을 받았다.


 


친구는 작고 예쁘다.  한혜진과 이효리를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결혼하고 아들 둘을 낳았지만, 여전히 날씬하고 소녀 같다. 긴 단발에 자연스러운 C컬파마를 선호했다. 롱치마와 카디건을 즐겨 입고, 꽃집에서 계절마다 꽃을 사서 식탁을 장식한다.


  


모임 다음날이 시어머니 제사인데, 육지에서 내려오는 형님과 사이가 좋지 않은 친구는 하루 전날부터 걱정하기 시작했다. 남편보다 시아버지가 더 좋다는 말로 모임에 참석한 친구들에게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런 친구가 월요일에 아팠다면 분명 일요일 제사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으리라.




오늘 오전에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아프다는 말이 마음에 걸려서 죽이라도 쑤고 가려던 참이었다. 친구가 톡을 받고 전화를 했다. 아무것도 못 먹고 누워 있었다며, 일요일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나는 전적으로 친구의 입장에서 듣고 화를 냈다. 착하디 착한 친구가 어이없이 당한 일에 친구보다 더 흥분하며 말했다. 친구가 웃었다. 그렇게 전화를 끊었는데 조금 있다 톡이 왔다. 내가 소개해 준 미용실에 머리 하러 간다는 것이다.




"있잖아. 친구가 많이 아팠대. 그래서 내가 미용실에 가라고 했어."


"어머니, 너무 뜬금없지 않아요?"


"아니, 지극히 정상적인데?"


"어디 가요?"


큰 딸을 태우고 학원에 가는 길에 친구이야기를 했다.


"잘 봐. 일단 모임에서 미숙이 이모가 나한테 어느 미용실을 다니냐고 물었어. 그래서 내가 미용실을 가르쳐줬어. 그때 미숙이이모가 전화 왔고, 많이 아프다고 하길래 나는 누워만 있지 말라고 했거든. 그랬더니 미숙이가 미용실에 간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잘 생각했다고 했지."


"근데요. 어머니. 아프다고 하면 병원에 가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진짜 아프면 그렇지. 그런데 미숙이 이모는 마음이 아픈 거야. 그 상태로 병원에 가도 어디가 아픈지 의사는 몰라."


"그런데 미용실에 가면 아픈 게 나아요?"


"당연하지. 잘 봐. 시댁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소화가 안 되고 밤새 토를 했어. 머리가 어지럽고, 지끈거리는데, 거울을 보니 꼴이 엉망이야. 우중충한 날씨에 커튼을 닫고 하루 종일 누워 있었더니 머리는 더 아파와. 그럴 때 필요한 게 뭐겠어?"


"잘 모르겠는데요."


"그래, 넌 모르는 게 당연하지. 나중에 알게 될 거야. 병원보다 미용실이 왜 위로가 되는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길 때 미용실에 가는 습관이 있다. 내가 못 견디는 일이 있을 때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염색을 한다. 나를 내가 아닌 것처럼 만든다. 잔뜩 괴롭히고 싶어질 때 머리를 지지고 볶는다.




남동생은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온몸에 문신을 새겼다. 갑자기 달라진 환경과 엄마의 죽음 때문에 유학에서 돌아와야 했던 분노, 믿었던 아버지의 배신까지 스무 살의 남자아이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한꺼번에 생겼다. 남동생은 문신하고 군대를 갔고, 군대에서 심한 따돌림과 구타에 시달렸다. 그 모진 시간을 견뎌냈다. 누나한테는 괜찮다고 하면서. 속이 문드러지는 시간을 버텨냈다.





 친구는 한 번도 우리 앞에서 시댁 흉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있는 흉 없는 흉 다 볼 때도 친구는 언제나 시댁이 좋다고만 했다. 성격차이다. 나는 있는 걸 과장해서 말하는 스타일이고, 친구는 참고 견디는 사람이다.

나는 말하면서 푸는 사람이고, 친구는 안으로 삭힌다. 그래서 친구가 괜찮다고 하면 마음이 아프다. 괜찮으면 39킬로가 될 수 없다. 뭘 먹어도 맛이 없고, 잠도 깊이 못 자는 친구는 괜찮다고만 한다. 나는 그런 친구를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안쓰럽고 도와주고 싶은데 달리 방법이 없다. 파마하는 친구옆에 수다를 떨며 앉아 있었다.


 


 친구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착한 사람들이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욕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는 말이 싫다. 왜 순하고 여린 사람은 못 견디고, 독하고 모진 사람들만 살아남는지 모르겠다. 나는 친구가 못 된 형님보다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듯이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만의 숨구멍이 필요하다. 나에게는 그게 글쓰기다. 다른 이에게는 그림이나 만들기, 친목이나 등산, 골프 등 취미생활이 될 수 있다.




 압력밥솥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불을 끄고 김을 빼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없이 추가 돌아가다 어느 순간 폭발한다. 사람도 참는 데 한계가 있다. 꾹꾹 눌러 담고, 안으로 삭히고, 속으로 파고들면 몸이 먼저 백기를 든다. 이러다 죽겠다며 제발 그만하라고 한다. 그럴 때는 몸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마음의 소리만큼이나 몸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친한 언니가 과메기를 선물해 줬다. 할 수 없이(?) 보해소주를 사고 왔다. 마침 남편이 서귀포 모임이 있어서 성산에서 자고 온다는 말에 앗싸를 외쳤다. 과메기 한 접시를 다 먹었다. 내일 아침이면 얼굴이 반지르하겠지. 비가 꼭 봄비처럼 내리고 있다. 멀리서 비행기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제주를 떠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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