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소설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장래희망난에 '소설가'라고 적은 후,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소설가가 되고 싶은 이유는 간단했다. 소설이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도 가난했던 우리 집에는 책이 없었다. 교실 뒤에 있던 학급문고의 책을 읽고, 친구네 집에 있는 세계문학전집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감귤 농사가 끝나는 겨울이면 커다란 가죽가방을 멘 책판매원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책을 팔았다. 우리 집에 과수원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책판매원은 아이가 셋 인 것을 확인하고, 공을 들여 엄마를 설득했다. 나는 관심 없는 척했지만 삐그덕 대는 나무마루 위에 펼쳐진 새 책이 갖고 싶어 안달이 났다. 작은 방에서 판매원을 거세게 응원했다. 오랫동안 설명이 이어졌고, 엄마도 고민하는 것 같았다. 큰 딸이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엄마도 알고 있었다. 엄마의 한숨소리, 가격을 말하는 판매원과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는 엄마, 주섬주섬 책들을 가방에 넣는 소리가 들리면 이번에도 틀렸구나 싶어 심통이 났다.
완행버스가 30분에 한 대씩 다니는 시골마을에서 할 일이라고는 들판을 돌아다니거나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친구들은 일요일마다 밭에 가는 게 힘들다며 울상을 지었다. 우리 집은 밭이 없었다. 남의 밭 일을 해 주고 살았던 부모님은 항상 불안했다. 안정, 편안이란 단어와 거리가 먼 삶이었다.
6학년 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었다. 그 후 어떤 책을 읽어도 <데미안>이 주었던 감동을 따라가지 못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새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나는 의미도 모르면서 이 문장들을 외우고 다녔다. 시골마을에 사는 답답함, 가난한 부모는 내가 깨뜨려야 할 세계였다.
소설은 매력적이었다. 주인공의 모험과 사랑, 도전을 간접경험하며 조금씩 꿈을 꾸기 시작했다. 매일 밤 쥐들이 천장에서 운동회 하는 소리를 들으며 소설을 읽었다. 비루한 우리 집이 소설을 읽다 보면 베르사유의 궁전이 되고, 그리스의 신전으로 변했다.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책이 더 재미있었다. 나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세상의 모든 일이 기쁨이었고, 지독한 아픔이었다. 집이 싫었다. 천장 위에 사는 쥐들이나 좁은 집에 모여 사는 8명의 식구들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다르게 살고 싶었다. 지금과는 다르게. 내게 소설은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출구이자 옆에서 재미있는 말을 해 주는 친구였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잡아주는 좋은 선생님이었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읽고, 펑펑 울었던 날 결심했다. 사람들을 울리고,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소설을 쓰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