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경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고, 엄마는 결혼자금이 하나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밀어붙였다.
삼성전자매장에 가서 매장에서 제일 비싼 냉장고를 골랐다. 19년 전에 이백오십만 원짜리 냉장고.
티브이랑 냉장고만 합쳐서 오백만 원 정도였는데 상상도 못 했던 금액이라 엄마 옆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괜찮아. 카드로 샀다가 축의금으로 갚으면 돼.
아,
엄마는 큰딸의 결혼식을 완벽하게 치르고 싶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다. 허술하게 보였던 엄마가 일일 척척 진행시키는 걸 보면서 ~역시 우리 엄마~를 외쳤다
결혼할 때 들고 온 냉장고는 19년째 똑같은 자리를 지켰다. 혼수로 해 온 전자제품들이 차례로 바뀌는 동안 혼자 묵묵히 서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나도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백기를 들었다.
냉장고 안에서 계란이 얼기 시작하고, 야채실에 놓아둔 콩나물이 얼려 있었다. 사다 놓으면 다 얼리는 통에 뭘 사놓지도 못했다. 그나마 냉동실은 정상이었는데, 갑자기 아이스크림이 다 녹는 일이 생겼다. 아이들이 녹았다 다시 얼린 아이스크림을 먹고 장염에 걸렸다.
때마침 3년 동안 친한 엄마들이랑 부었던 적금이 만기됐다. 다른 엄마들은 주식을 사네, 금목걸이를 사네. 했지만 나는 냉장고를 바꾸기로 했다.
냉장고 구석에 자리한 커다란 고추장통이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담가주신 고추장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병이 터져서 고추장이 새어 나왔다. 차마 먹지 못 하고 갖고 있었다. 오늘 고추장을 꺼내 놓았더니 검은색이었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친한 언니말로는 약고추장이라고 한다.
맛난 멸치 사다가 고추장에 찍어먹어야겠다. 아끼면서 조금씩 먹어야지.
한 곳에서 19년째 살고 있다. 가끔 이런 이벤트가 있어야 정리를 한다. 큰딸은 바이올린연습하러 가고, 막둥이랑 아들이 열심히 도와줬다. 냉장고 안에 참 많이도 들어있었다. 포스팅을 위해 사진을 찍는데 아이들이 자꾸 화면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 너희들을 어떻게 말리겠니.
현관문이 좁아서 어떻게 들어올까 걱정을 했는데, 냉장고문을 떼고 들고나간다고 한다. 예전과 달리 많이 발전한 것도 같다. 분리되는 19년 된 냉장고. 진짜 안녕이다.
냉장고를 바꾸면 엄청 슬플 줄 알았는데, 새 냉장고에 깔끔하게 정리를 해 놓으니 기분이 좋았다.
붙잡고 싶었던 건 어쩌면 그때의 기억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면 오는 것인데, 보내지 않고 잡아 있으면서 매번 힘들다고 징징거리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19년째 붙잡혀 있던 우리 집 냉장고에게 괜히 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