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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멸의 칼날, 궁극의 힘

매일 글쓰기 No. 6

by 레마누


남을 위해서 하는 일은 결국 돌고 돌아서 나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귀멸의 칼날 중-


큰 딸이 <귀멸의 칼날>에 빠진 건 초등학교5학년 때였다. 마트에 가도 사탕 하나 사 달라고 한 적이 없던 아이가 갑자기 서점에서 책을 꺼냈다. 나는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딸의 변한 모습에 어리둥절하며 결제했다. 그 후로 아이는 서점에 갈 때마다 한 권씩 모으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가 준 용돈도, 어린이날이라고 큰엄마가 준 돈도, 모았다가 만화책을 샀다.


한 권씩 모으는 재미를 알고 있다. 어린 시절 내가 친구네 집에서 100권짜리 세계명작을 다 읽을 수 있었던 건 간절함 덕분이었다. 지금 아니면 못 읽는다는 조바심과 읽고 나면 돌려줘야 한다는 아쉬움이 늘 따라다녔다. 밀감 수확이 끝나면 검은 사각가방을 든 책장수아저씨가 동네 한 바퀴를 돌 때 엄마는 마당에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동네에서 과수원이 없는 건 우리 집뿐이었다.


나도 갖고 싶었다. 책장에 가지런히 늘어선 전집을. 1번부터 시작해서 한 권씩 읽고 돌아와서 다시 읽고, 줄도 치고 싶었지만 빌려온 책은 남의 것이었고, 그럴 수 없다는 걸 13살에 알았다. 사 달라고 떼를 써도 안 된다. 그러면 젊고 예쁘지만 가난한 엄마가 속상해하니까.


큰 딸이 6살 때 홈쇼핑이나 다른 엄마들을 통해 이때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하며 전집추천을 많이 받았다. 나는 못 샀지만, 아이들은 사 줄까? 생각도 했다. 그때마다 동네에서 전집을 다 읽은 사람은 집에 책이 없는 나뿐이라는 걸 기억했다. 부족하고 아쉬워야 간절함이 생긴다.


딸이 모은 귀멸의 칼날

대신 아이들과 도서관에 자주 갔다. 다행히 우리 집 근처에는 좋은 도서관이 세 군데나 있었고, 매점 음식도 맛있어서 아이들이 좋아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고 읽다 이건 꼭 갖고 싶다고 하면 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 시험을 잘 봤거나 반장이 됐을 때, 혹은 대회에서 상을 받았을 때 등 보상의 의미가 강했다. 생일 선물이나 어린이날 선물에도 책을 원하면 사줬다.


그렇게 열심히 만화책을 모은 큰 딸은 <귀멸의 칼날> OST만 듣고, 천 피스 퍼즐을 두 개 맞추고, 피규어를 모으더니 급기야 매일 귀칼 인물을 그렸다. 귀칼노래를 들으며, 무이치로와 텐겐을 우리 오빠야라고 불렀다. 딸은 따로 일본어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일본어 시험은 항상 백점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귀멸의 칼날>은 너무 잔인하다 말하는 친구가 있다. 맞다. 도깨비들은 잔인하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약하지만 뭉치면 강하고, 도깨비들은 강하지만 이기적이다. 인간의 목적은 타인을 위한 것이고, 도깨비들은 개개인의 욕심에 따라 움직인다. 불리한 싸움인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이길 수 있었던 건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다. 딸과 이런 말을 주고받다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산속에서 숯을 만들어 팔며 살고 있는 탄지로와 가족들은 가난하지만 따뜻한 집에서 서로를 위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숯을 팔기 위해 마을로 내려갔던 탄지로는 눈이 많이 내리자 마을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집에 돌아갔는데. 여동생인 네즈코만 빼고 모두 죽어 있었다.


설령 내가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일지라도 타인은 쉽사리 짓밟을 수 있는 거야.

가족, 친구, 연인은 나에게 소중한 존재이지만 타인에게도 과연 그럴까?


도깨비들은 인간을 잔혹하게 죽이며 자신의 힘을 키워나간다. 영원한 삶을 꿈꾸며..

탄지로는 도깨비가 된 네즈코를 다시 사람으로 만드는 법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마음씨 좋고, 착하기만 했던 탄지로는 네즈코를 지키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귀살대에 들어가 혹독한 수련을

참아낸다.


도깨비는 고통을 못 느낀다. 육체의 일부가 잘려도 금방 회복된다. 신출귀몰한다. 몇 백 년 동안 살면서 인간을 잡아먹으며 힘을 키웠다. 인간은 고통을 느끼고 회복이 느리다. 인간이기 때문에 아프고 두렵고 망설인다. 인간인 상태로 도깨비와 싸우면 지는 것이 당연하다.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귀살대는 자신만의 호흡법을 배우고 연마한다.


귀살대원들이 처음부터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평범하게 살고 있던 사람들의 일상이 갑자기 무너졌다. 가족이 몰살당하고, 연인이 죽으며, 형에게 내쳐진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폭발한다. 혹은 절망하고 슬픔에 빠진다. 그때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너무도 강력한 힘에 굴복하고 무릎을 꿇을 것인가

살이 뜯겨나가는 고통을 견디며 사람들을 혹은 자신의 신념을 지킬 것인가.


내 꿈은 그저 가족과 조용히 사는 것이었다. 작은 집이 좋다. 이불을 나란히 붙이고 자고

싶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 보이는 거리. 손을 뻗으면 바로 잡을 수 있는 그들이 닿는 거리

그것만으로 족했는데. 그런 것조차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필 도깨비가 이 아름다운 세상에 존재하고 있어서, 나는 도깨비 사냥꾼이 되었다.


도깨비는 사람일 때부터 질투와 욕심, 분노와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을 도깨비의 수장인 무잔은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 도깨비가 되어 영원불멸의 삶을 살자고 손을 내민다.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도깨비의 힘을 빌어서라도 아니 흉한 몰골의 도깨비가 되어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고 한다.


약자는 토나와 내가 싫어하는 것은 약자뿐이야.


태어났을 때는 누구나 연약한 갓난 아기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어

너도 마찬가지야. 이카자. 기억에는 없을지 몰라도 갓난아기 시절 너는 누군가의 보호와

도움을 받았기에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거야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돕고 지키는 것. 그리고 약한 자는 강해져서 또다시 자기보다

약한 자를 돕고 지키는 것. 그게 자연의 섭리야.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노력하고 수련하는 귀살대 대원들은 스스로를 다독이고, 동료를 응원하며 서로를 믿고 의지한다. 쓰러진 동료를 내치지 않고, 끝까지 지켜낸다.

그리고 희생된 귀살대에게는 진심으로 감사와 존경을.. 어린 몸으로 정말 끝까지 , 훌륭하게

싸워졌다고 말을 한다. 희생은 불가피하지만 결코 헛된 죽음으로 남지 않았다.


한발 늦었다. 나 때문이야. 내가 지휘를 잘못했어.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이 학살당한다. 모두가

오늘, 아니 이날을 위해 무잔을 쓰러뜨리기 위해 해 온 일들이 전부

모조리 나 때문에 허사가...

정신 차리세요. 큰 어르신. 어서 다음 지시를...

싸움은 아직 안 끝났어요..

그래, 큰 어르신,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모두 다 똑같은 중압감과 고통을 감내하셨지.


극한의 공포와 위험, 그리고 한계를 오직 정신력과 의지로 극복하고, 상상할 수 없는 훈련으로 육체를 강화시키며 도깨비를 섬멸하고자 했던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 힘을 불태우고 장렬하게 죽어가는 사람들.


23권을 읽는 동안 평범했던 탄지로가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를 지켜봤다.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주저했는지를 알게 됐다. 그래서 탄지로를 응원하고, 탄지로가 울면 마음이 아팠다.


주인공인 탄지로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 하나하나 역시도 독특한 개성과 사연을 담고 있어서 취향에 따라 좋아하는 인물이 달라지는 재미도 있었다. 몰입.


단순히 유명한 만화책이라고 해서. 영화가 흥행했다고 해서. 아이들이 매일 읽고 있기에

호기심 때문에 집었다가 마지막 화에서 엉엉 울게 만들었던 ‘귀멸의 칼날’

남편은 이제 하다 하다 만화책까지 베끼냐고 하지만(필사하는 게 버릇이다)

모르시는 말씀.

만화책에 주옥같은 글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빠 빼고 4명이 <귀멸의 칼날>을 다 읽었다. 번외 편까지. 극 E인 나와 아들은 20편부터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읽다 나중에는 대성통곡을 했고, 큰 딸은 참다 참다 21편부터 울었다. 막둥이는 언니, 오빠. 엄마가 울든 말든 심드렁하게 읽더니만 방에 들어가 이구로를 열심히 그린다. 남편은 만화책은 읽지 않았지만, 넥플릭스에 나온 시리즈는 같이 봤다. 우리 식구는 모두 <귀멸의 칼날>을 좋아한다. 그래서 할 말이 많다.


얼마 전에 쓴 '옴니보어'라는 단어는 어렵지만, 나이와 성별을 허물고 부모 자식을 떠나 서로 좋아하는 캐릭터를 말하고, 인상 깊었던 장면을 공유하는 것이 '옴니보어'는 아닐까 싶다. 아이들이 뭘 좋아하는지 들여다보고, 이왕이면 같이 보고, 시간 내서 같이 한다. 뭐라도 한다. 하다 보면 재밌다. 내가 <귀멸의 칼날>에서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이노스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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