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냉전 중이다. 정확히 말하면 남편은 어제저녁을 안 먹었고, 나를 보며 말하지 말라고 해서 지금까지 말을 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밥솥이었다.
사은품으로 받은 쿠쿠압력밥솥을 쓰고 있다.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5년은 넘은 것 같다. 밥순이인 우리 가족은 밥을 정말 많이 먹는다. 매일 저녁 금방 한 밥으로 저녁상을 차리고, 남은 밥은 아침밥으로 먹었다. 방학 때는 삼시세끼 밥을 먹어서 더 자주 밥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밥을 하면 누룽지가 생겼다. 저녁에 한 밥을 아침에 먹으려고 하면 누렇게 변하고 맛이 없었다. 금방 한 하얀 밥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남편은 내게 잔소리폭격을 날렸다. 밥통설정을 잘못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양어장 부엌에서 사용하는 밥통도 주방이모가 사용할 줄 몰라서 밥이 맛없었다고 하며, 나보고 똑바로 알아보고 밥을 하라고 했다.
나는 코킹도 바꿔보고, 밥통을 깨끗하게 씻어도 보고, 열심히 밥맛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쌀이 문제인가 싶어 마트에서 좋다는 쌀을 사다 먹어도 그 맛이 그 맛이었다. 그러다 이번 여름에 리조트에 가서 숙소에 있는 작은 쿠쿠밥통으로 밥을 짓고 나서 알았다. 쌀이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집에서 가져간 쌀로 밥을 지었는데, 윤기가 좌르르 흐르고 고소한 것이 정말 맛있었다. 아이들도 환호성을 지르며 이게 우리가 매일 먹던 그 쌀이 맞느냐고 물었다. 그 후 밥통이 문제라는 것에 의견이 일치한 우리 부부는 밥통을 바꾸기로 하고, 홈쇼핑에서 밥통이 나올 때마다 눈여겨보고 있었다.
추석이 끝나고 바로 우리 집에서 할머니제사가 있었다. 이왕이면 손님들에게 맛있는 밥을 해 주고 싶은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러다 눈에 띄는 밥통을 만났고, 큰맘 먹고 10개월 무이자로 주문을 완료했다.
어제 밥통이 도착했다. 영롱한 화이트에 세련된 디자인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최신무기를 장착한 장수처럼 사기충천하여 연마제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닦고 또 닦았다. 그리고 저녁에 밥을 했는데.
이상했다. 쌀 물을 잘못 맞췄나? 밥이 생각보다 맛이 없었다. 거기다 밥솥에 밥풀이 너무 많이 묻었고, 누룽지까지 생긴 게 아닌가?
-오뻐. 밥을 했는데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남편이 소리쳤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부터 설정을 잘하라고 했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뭐가 그리 급해서. 밥통만 사면 뭐 하냐? 똑바로 사용도 못 할걸.
-그게 아니라고. 알지도 못하면서 왜 큰소리치는데?
그 사이 밥냄새를 맡고 밥에서 나온 막둥이와 아들이 부엌을 서성거렸다. 운동하고 돌아왔으니 배가 고팠을 것이다. 닭다리 6개와 닭 한 마리를 넣고 푹 끓인 후 불려 놓은 넙적 당면을 넣은 닭볶음탕을 두 개의 접시에 나눠 담았다.
아이들은 내가 한 닭볶음탕이 제일 맛있다고 한다. 어떤 날은 신김치를 넣어서 하고, 또 어떤 날은 마늘을 듬뿍 넣어서 만들기도 해서 할 때마다 맛이 다른데 그래도 엄마의 닭볶음탕은 최고라고 해준다. 남편의 느닷없는 급발진에 당황했지만, 아이들을 보며 참기로 한 나는 거실에 나가 남편에게 밥을 먹으라고 했다.
그랬더니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안 먹어라고 하는 게 아닌가. 어이가 없었다. 7살 난 아들도 아니고, 화가 났다고 밥을 안 먹는다니. 그래? 네가 아직 배가 덜 고팠구나. 내장비만인 당신에게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생각하며 두 번 권하지 않고 돌아섰다.
나는 원래 저녁을 안 먹을 생각이었지만, 나까지 안 먹으면 아이들이 먹다 체할 것 같아서 식탁에 앉아 아이들과 깔깔거리며 닭다리를 들었다. 막둥이가 몇 번 아빠에게 가서 닭볶음탕이 맛있다며 같이 먹자고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저녁 먹은 것을 치울 동안에도 남편은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여름이면 우리 가족은 안 방에 에어컨을 켜고 다 같이 잔다. 이불 세 개를 나란히 펼쳐놓고 잔다. 감기기운이 있던 아들이 9시를 조금 넘기자 잔다며 안 방으로 들어왔다. 아들을 재우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에 아들이 엄마가 여기서 자면 아빠는 어디서 자?라고 묻길래 아빠는 오늘 안 들어올 거야. 오늘은 왠지 소파에서 잘 거 같아라고 말했다. 왜 그러냐고 묻길래
-음. 삐친척하면서 새벽까지 게임하고 티브이 실컷 보다 잘 것 같은데.
-엄마, 그러면 오히려 좋은 거 아니에요?
-그런가?
-아빠 부럽다.
-그래도 넌 아빠처럼 삐쳤다고 밥 안 먹고 잠 안 자고 그러지 마. 그럼 엄마 속상해.
- 안 그러는 거 알잖아. 내가 아빠보다 엄마 더 닮은 거 알지?
남편님아. 지금까지도 삐쳐서 말 안 하는 남편님아. 삐쳐도 차려 준 아침밥 뽕그랗게 먹고, 원두커피 내려서 막둥이에게 배달시키니 또 잘 마시고, 점심으로 막둥이가 먹고 싶다는 돼지국밥과 순대국밥을 사 와서 아이들은 돼지국밥을 당신과 나는 순대국밥을 또 뽕그랗게 드신 남편님아.
삐쳐서 아침 아들 영재수업도 내가 데려갔다 데려오고, 큰 딸 수학학원도 내가 다 픽업하지만, 나는 당신이 집에서 소파에 앉아 있는 동안 이렇게 나와 커피숍에서 큰 딸을 기다리며 글을 쓰고 있으니 이 모든 시간이 당신 덕분입니다.
그리고 남편님아, 당신은 삐쳐서 말을 안 하겠지만, 오후 후 4시면 나는 시 어머가 불려 놓은 찹쌀을 들고 떡집에 가서 가루로 만들어오고, 내일부터 앞집 사는 시어머니와 오가며 부지런히 명절준비를 할 텐데 당신은 그래도 나에게 말 한마디 안 하겠다면 저는 기꺼이 당신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당신은 나와 말을 하기 싫다고 하시니 당신을 사랑하는 저는 싫다는 것을 굳이 하고 싶지 않아서 저도 말을 걸지 않겠습니다. 예전 같으면 답답해서 항상 내가 먼저 백기를 들었지만, 지금은 세 아이들이 내 옆에 있고, 이렇게 당신이 보지 않을 브런치에다 고하듯 글을 쓸 수 있으니 아마 제가 먼저 말을 걸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친정일에 마음 복잡한 저를 이렇게 몰아세워서 분노의 글을 쓰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제가 쓴 소설의 지분은 온전히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 덕분에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들이 날아다닙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지금이라도 못 이기는 척 말을 걸어온다면 저 역시 못 말리는 척 넘어가겠지만, 너무 오래 끌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에전에 저는 당신의 눈만 봐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지만, 애 셋을 낳고 키우며 오십이 다 되어가는 지금은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으니 나만 보면 변했다고 하지 말고, 부디 당신도 변해주시기를. 당신이 나를 참고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둘이 서로를 참고 견딘다는 것을 묵언수행을 통해 깨닫기를 기원합니다.
*알고 보니 이번에 산 밥솥은 온스텐내솥이라 밥이 잘 둘러붙는다고 한다. 말을 하기 전에 한 번 더 알아봤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을 턴데. 나의 경솔함을 반성하며. 그렇지만 남편님. 이번만은 저얼대 먼저 말을 안 걸거예요.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