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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Sep 17. 2024

추석준비와 시어머니의 생파

1938년생인 어머니는 20대 초반에 아버지와 결혼했다. 아버지는 누나 네 명과 여동생 둘이 있는 집의 외동아들이었다. 큰 형은 일본에 가서 살다 돌아가셨고, 남동생은 6.25 전쟁 때 군인이었는데 생사를 모른다고 한다. 어머니가 결혼해서 살림을 차린 곳에는 어머니의 시어머니 즉 남편의 할머니가 출가하지 않은 딸과 아들과 살던 옛날 집이었다.



 어머니는 결혼하고 일 년 만에 딸을 낳았는데, 이틀차이로 몸조리를 하러 온 시누이의 밥을 차려주었다. 시누이와 시어머니와 또 다른 시누이들이 방에 모여 갓난아기를 둘러싸고 깔깔거리며 놀고 있을 때, 어머니는 포대기에 목이 늘어진 딸을 업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미역국을 끓이고 가마솥에 밥을 했다. 친정아버지가 가져다준 소고기와 미역을 먹으며, 막내 시누이는 한 달 동안 몸조리를 하다 돌아갔다.



 일 년에 12번의 제사와 추석, 명절을 지냈는데 결혼한 시누이들은 빠지지 않고 제사 먹으러 왔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시누이 6명과 시누이의 남편들, 조카까지 오면 30명이 넘었다. 사람은 많은데 정작 일을 하는 사람은 어머니와 마음씨 좋은 손윗 시누이 둘 뿐이었다. 일하는 사람 따로 노는 사람 따로인 곳에서 5년을 버틴 어머니는 결혼 5년 만에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친정 근처로 이사했다. 


 

 시어머니는 아들 셋이 있는데, 막내아들을 유독 아꼈다. 어머니가 사시는 집 앞 허름한 집이 마침 싸게 나와서 어머니는 그 집을 샀다. 아들이 살 집이라 생각하고 공을 들여 집을 지었다. 나는 결혼하기 전에 완공된 집을 오가며 환기를 시키고, 바닥을 쓸고 닦았다.



결혼하고 첫제사를 준비할 때 일이다. 큰 형님과 작은 형님은 아침 일찍 와서 저녁까지 일하다 돌아갔는데, 나는 집이 바로 앞이라 어머니네 집에 더 있었다. 밤 12시까지 고기적을 두들기고, 동그랑땡을 만들었다. 어머니는 며느리들이 있다고 음식을 더 만드는 게 아니라며 원래 하던 것의 반만 하는 거라고 했다. 커다란 냄비에서 묵을 만들 때 어머니는 쉬지 않고 국자를 돌렸다.



 반복이었다. 명절 때면 18마리의 생선을 구웠다. 어머니는 잘 차린 제사상이 사업을 번창시키고, 자식들의 성공을 보장한다고 믿었다. 자신의 몸을 갈아 넣으며 준비한 음식들을 집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대접하고, 집에 돌아갈 때 검정 비닐에 과일과 떡을 싸 주며 할 도리를 했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결혼하고 2년째 되던 해 어머니는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시아버지가 삼 형제에게 제사를 나누었다. 막내아들인 우리 집은 추석 4일 후에 있는 할머니제사와 1월 증조할아버지제사를 맡았다. 시어머니는 제상과 밥상, 놋그릇과 스테인리스그릇, 접시까지 자신이 평생 모아 온 것들을 며느리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셨다.



결혼 21년 차인 나는 이제 혼자서 제사준비를 척척 한다. 어머니는 송편을 빚고, 솔잎을 넣고 찌고, 시루떡을 만들고, 묵을 쑤고, 동그랑땡을 반죽해서 만들었지만 며느리들은 맛있는 곳을 검색해서 산다. 어머님은 사고 온 것은 양도 적고,  뭐가 들었는지 모른다며 구시렁대지만 며느리 셋이 똘똘 뭉쳐서 들은 척을 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어머님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이야기한다. 시누이들의 만행을 이르고, 시어머니의 횡포를 고자질하며, 남편의 무관심에 자신이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토로한다. 처음에는 그럴 수 있냐고 맞장구쳤지만, 똑같은 얘기를 20년이 넘게 듣다 보니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그렇게 어머니를 괴롭혔던 시누이들 중에 4분은 돌아가셨고, 한 분은 요양원에 누워 계시며, 한 분은 치매가 심각하니 건강하게 남아 있는 어머니가 최후의 승자라고 하면 어머니는 웃는다.



어머니는 음력 8월 14일이 생일이다. 큰 며느리가 들어오기 전까지 어머니는 추석준비로 바빠서 생신상을 체대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잔정이 많고, 다정한 큰 형님은 어머님의 생신상을 차리고, 선물을 준비했는데, 손주들이 커가면서는 아이들에게도 꼭 할머니에게 생일카드와 선물을 주라고 시킨다. 결혼하고 형님이 그렇게 책 익는 걸 보면서 나도 따라 했는데, 원래 무심하고 기념일을 잘 챙기지 못하는 나는 까먹기 일쑤였다.




어제 추석음식을 마치고, 저녁에 우리 집에서 어머님의 간단한 생파가 있었다. 어머님은 이런 걸 준비했냐며 손사래를 쳤지만, 케이크의 촛불을 켜며 좋아하셨다. 며느리들이 하는 말은 듣지도 않고, 며느리들이 하는 건 다 다 못 마땅한 어머니지만, 정작 어머님의 생신을 챙기는 건 며느리들이다. 어머님이 그렇게 사랑하는 삼 형제는 무뚝뚝하게 앉아서 밥만 잘 먹는다. 



어머니는 세상이 변해서 편해졌다고 한다. 탱자탱자노는 며느리들에게 하는 소리다. 어느 시대나 그들만의 고충이 있는 걸 어머니는 모른다. 그렇다고 38년생인 어머니에게 꼬치꼬치 따지지도 못한다. 



 누군가 물었다. 시어머니가 보통이 아닌데 어떻게 앞뒷집에서 20년이 넘게 살고 있냐고. 


나는 그냥 어머니를 할머니처럼 대한다. 우리 엄마는 동네싸움닭인 할머니와 평생을 함께 살았다. 할머니들은 원래 불만이 많다. 옛날에 비하면이란 말로 지금을 후려진다. 먹고 사느라 급급해서 주변을 돌아볼 시간도 타인의 마음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할머니는 글을 몰라도 온몸으로 시대를 견뎌냈다. 시어머니도 그런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미운 것보다 안쓰럽고 불쌍한 마음이 든다.



  험한 소리가 나오면 나 좀 봐 달라는 거구나 싶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면, 뭐가 또 못 마땅해서 그러시나 싶다. 어머니와 함께 살다 보니 패턴이 보이고 어머니의 생각이 읽힌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 시어머니는 독하고 막무가내인 할머니가 된다. 


명절 때 어머니의 잔소리가 심한 건 그때 아니면 볼 수 없는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기 때문이다. 평소에 어머니와 말을 많이 하는 나는 가족이 모인 날에는 오히려 말을 줄인다. 어머님은 내 마음을 모르겠지만, 나는 안다. 내가 조금 더 낫다. 그러니까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 어머니가 견디고 살아줘서 우리가 존재한다. 



18마리의 생선이 9마리로 줄었다. 음식의 양이 전보다 많이 줄어서 준비가 빨리 끝났다. 서슬 퍼런 어머니의 기세도 세월 앞에서 무뎌진다. 아무리 막으려고 애써도 변화는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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