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49제는 지장보살님의 말씀에 따라 돌아가신 날로부터 7번으로 나누어 재를 올리고 마지막 49일째 재를 베풀어 돌아가신 영가를 극락으로 왕생시키는 제사의식이다.-네이버 지식백과-
오늘 6번째 새벽불공에 갔다 왔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세수하고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미지근한 물과 함께 고혈압약을 먹고, 책을 읽었다. 5시 40분 집을 나와 6시에 절에 도착했다.
얼마 전까지 새벽에도 후끈거리는 열대야가 있었는데, 오늘 만난 바람은 훅 하고 옷 속을 파고들었다. 훅하고 숨을 크게 쉬니 가슴이 시원해지는 게 완연한 가을바람이었다. 계절은 또 이렇게 모습을 바꾸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올려다본 하늘에 오리온이 빛나고 있었다.
스님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오는 영가의 이름은 얼마 전까지 나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었다. 죽음은 한순간이지만, 미련인지 아쉬움인지 안타까움인지 모르는 감정은 질기게 남아 절을 하는 내내 눈물을 자아냈다.
영정 앞에 잔을 올렸다. 이상한 일이다. 언젠가 증명사진이 잘 나왔다며 보여줬었는데, 그가 좋아했던 증명사진이 영정사진이 되는 순간 빛을 잃었다. 49제를 치르는 내내 점점 희미해져 가더니 오늘 본 그의 눈이 슬퍼 보였다.
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우리 4남매는 어쩔 줄을 몰랐다. 일주일에 한 번 새벽 4시에 극락사에서 49제 불공을 지냈다. 누런 상복을 입고, 스님이 영가 송순열을 부를 때마다 우리는 울었다. 억울하고 어이가 없어서 울었다. 어미 잃은 자식들은 우는 일 말고 할 게 없었다. 무릎을 꿇으며 울고, 일어서며 울었다. 한 명이 울면 따라 울고 누군가 눈물을 먹으면, 옆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엎드리면 눈물이 앞을 가렸다.
불공이 끝나고 주지스님이 우리를 불러 앉히고 말씀하셨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영가를 잘 보내기 위해 49제를 지내는 것인데, 이렇게 울면 아무 소용이 없다. 마음을 잘 추스르고, 영가의 안녕을 빌어주는 것이 자식 된 도리일 것이다. 이제부터는 고생하다 가신 어머님이 아니라 이생의 인연이 끝난 어머니의 명복을 빌어주고, 극락왕생에 가실 수 있게 정성을 다하자고 하셨다.
그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엄마의 영정 앞에서 울었지만 예전처럼 서럽게 울지 않았다. 가까운 이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슬픔이고 안타까운 일이다. 엄마의 죽음은 엄마의 지난 세월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좋은 것보다 못 다 한 것들만 남아 미련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감싸 쥐었다. 우리가 그토록 서럽게 울었던 건 가버린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라기보다 남은 우리가 겪어야 할 엄마 없는 생이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스님은 우리의 그런 마음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지만,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가끔은 형식이 필요할 때가 있다. 우리는 엄마의 장례를 치른 후, 일주일에 한 번씩 칠 일제를 치르며 7번 울고 헤어졌다. 그러는 사이 우리 4남매는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살아갈 일을 생각할 수 있었다. 황망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절하면서 달랬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행위를 통해 삶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살아 있는 지금에 감사하고,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열심히 살아야겠다 다짐하며 죽은 엄마를 보내드렸다.
다음 주 일요일 10시에 돌아가신 시아주버님의 49제가 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기원한다.
기도의 목적은 남을 바꾸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 상황을 받아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형님의 프사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