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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Oct 10. 2024

나만의 행복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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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같이 살던 여자가 집 안의 쓸만한 물건들을 모두 들고나가고, 집이 경매로 넘어가게 된 후부터 친척들의 전화가 두려워졌다. 고모는 아무리 미워도 딸들이 아빠를 도와야 한다고 했고, 삼촌은 한 번 내려와서 아빠 사는 걸 보면 그런 소리가 안 나온다고 했다. 10년 동안 10억의 빚을 진 아빠는 그럴만했고, 친정이 힘들 때마다 남편에게 싫은 소리 들어가며 2억이 넘는 돈을 갖다 바친 나는 나쁜 딸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화만 안 받으면 된다는 거다. 예전에 아빠는 잔뜩 술이 취해서 한밤중에 임신한 딸의 집에 찾아와 횡를 부렸다. 마음대로 되지 않자 집에 불을 질러 다 죽여버리고 자기도 죽겠다는 말을 하자, 순하고 착한 남편은 겁에 질렸고, 그다음부터 아빠가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군소리 못하고 돈을 융통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남편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돈에 팔려온 사람이 된 것 같아 치욕스러웠다. 아빠는 어렸을 때부터 입버릇처럼 딸은 출가외인이라고 말했다. 결혼하고 나면 친정 쪽은 쳐다도 보지 말고 살라 해 놓고, 정작 아빠는 딸을 현금인출기로 생각했다. 등록금 한 번 내 준 적 없으면서, 키워준 공도 모르는 나쁜 년이라고 동네 사람들에게 딸 흉을 본다는 말이 들렸다. 남편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아빠와 같이 살던 여자는 10년 동안 10억의 돈을 빚져, 자기 딸의 가게를 네 번 차려줬고, 결혼을 시켰다. 엄마가 마흔 살에 낳은 귀하디 귀한 막둥이 남동생은 서울에서 바득바득 살아가는데, 10년 동안 아빠에게 받은 거라곤 다 합쳐서 오백만 원이었다고 한다. 우리만 보면 돈 없다고 하면서, 그래서 세뱃돈도 없다고 해서 미리 명절 전에 돈을 갖다 드리고, 아이들 앞에서 할아버지 위신을 세워줬다. 아빠는 평생 돈 만원이라도 용돈이라는 걸 준 적이 없었다.



 어젯밤 아이들을 재우는데, 통 연락이 없던 오촌삼촌이 전화를 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아빠의 사촌동생이자 아빠의 말이라면 꼼짝 못 하는 삼촌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며 내게 따지듯이 물었다. 삼촌은 아빠와 그 여자에게 9천6백만 원을 빌려줬다며 경매가 진행된다는 게 정말이냐고 물었다.



 여자는 딸의 가게를 차려주기 위해 우리 집과 과수원을 담보로 사채를 썼다. 한 달 이자가 이백오십만 원이었는데, 여자는 6개월을 이자 내다가 도망가버렸다. 아빠가 나에게 원하는 건 그 이자를 계속 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삼촌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삼촌은 그래도 네가 좀 어떻게 안 되겠냐고 물었다. 사람은 이기적이다. 당장 해가 되지 않는다면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친절하게 굴지만, 이해관계가 얽히면 철저하게 이기적이 된다. 이해했다. 삼촌도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데, 대출받아서 빌려준 돈이라 답답하고 화가 날 것이다. 하지만, 차용증도 없이 아빠말에 거절 못한 건 삼촌이다. 나는 아빠에게 직접 찾아가서 말하라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양 옆에서 아이들이 새근거리며 자는데, 눈이 말똥말똥했다. 어지러운 꿈을 꾸고 일어났더니 머리가 아팠다. 아이들을 챙겨 학교에 보내고, 세 시간 동안 집을 청소했다. 쓸고 닦고 정리했는데도 가슴이 답답했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가벼운 운동화를 신었다. 집 근처에 있는 오름을 올랐다. 일부러 크게 돌아서 갔다. 한 시간 30분 동안 걷는 것에 집중했다. 생각이 끊임없이 나오는데, 답이 없었다. 내가 주체가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할 수 있지만, 일흔 넘은 아빠의 머리채를 잡아 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동안 나는 아빠일만 생기면 머리가 아팠다. 그래서 종일 누워 있거나 술을 마셨다. 아이들 앞에서 남편하고 싸우고 소리 질렀다. 일을 벌인 건 아빠인데, 애꿎은 우리 가족만 힘들게 지냈다. 아빠와 같이 살던 여자는 우리 아빠돈으로 딸과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멍청한 아빠를 둔 죄로 나는 동생들도 만나지 못한다. 만나봐야 한숨만 나온다. 피해자는 우린데, 가해자들이 큰소리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었다.



 그래봤자 나만 손해라는 것을 알고 난 후, 나는 이불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머리 싸맨다고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부터 걸었다. 하니는 엄마가 보고 싶을 때마다 달렸다. 나는 화가 날 때마다 속상할 때마다 걷는다. 걷다 뛰고 숨이 차면 다시 었다. 그동안 운동을 열심히 해 둔 덕에 오래 걸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술 마시지 않고,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혼자 걸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별도봉에서 바로본 제주항

 

계단을 오른다. 숨이 차 오르지만 견딜만하다. 집에서 동생들과 아빠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으며 통화하는 것보다 덜 힘들다. 말은 밉다고 해도 아빠다. 궂은소리를 아무리 해 놓고 봐도 돌아서지 못하겠다. 그래서 속상하다. 내가 너무 좋아했던 사람인데, 나에게 전부였던 사람이 왜 그럴까. 이해할 수 없어서 걸었다.


 걸으면 생각이 정리된다. 일인극처럼 말을 주고받으며 걷다 보면, 무성한 나무와 넓은 바다가 보인다. 집에서는 커다랗던 고민덩어리가 밖에서 들여다보니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낑낑대며 끌어안는다고 달라질 것 없는 일이다. 정상이 목표가 아니다. 눈앞에 있는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도착해 있다. 숨 한 번 돌리고 나면 내려갈 일이 남았다. 올라올 때 무거웠던 발이 가볍다고 촐랑거리다 발이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 정신이 바짝 났다. 어제 내린 비에 흙바닥이 질겅거리는 걸 미처 몰랐다. 욕심부려 걷느라 바닥을 보지 않았다.



 한 시간 40분을 걷고 집에 왔다. 아침에는 체한 것처럼 속이 더부룩하고 답답해서 사과 하나 먹고 말았는데, 허기가 졌다.  아이들이 먹다 남긴 소고기주먹밥에 새송이버섯을 구워 먹었다. 살 것 같았다.



 몸은 가벼워졌고, 덩달아 생각도 정리됐다. 감사한 일이다. 스트레스를 안 받고 사는 방법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 그걸 푸는 것도 결국은 혼자해야 한다.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이라 어느 것 하나만 선택할 수 없다. 나는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불행이 찾아올 때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행복은 이미 내 안에 있음으로 슬픔이, 원망이, 미움이 행복을 몰아내지 않게 나만의 행복지킴이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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