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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Nov 05. 2024

부부골프의 묘미

같은 말이라도 예쁘게 하는 사람이 좋다

막둥이가 세 살 때 골프를 배웠는데,  지금 막둥이는 열 살이다. 막둥이가 걷고, 뛰고, 밥을 먹고, 고기를 뜯으며 어린이집에서 유치원, 초등학교를 다닐 동안 나는 연습장도, 필드도, 설렁설렁 다녔다. 열 살인 막둥이는 구구단을 외우고, 쉬는 날에는 종일 방에서 그림을 그린다. 친구들이랑 반모임도 하고, 엄마가 아프면 따뜻한 물을 떠다 준다. 아이가 커가는 동안 나는 나이를 먹었고, 주름살이 깊어졌으며, 귀밑에 흰머리가 났고, 신경질이 늘었다. 


골프를 배울 때는 잠자려고 눈을 감아도 스윙연습을 했다. 프로가 가르쳐준 대로치고 싶어서 연습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처음 필드에 나가기 전에 인터넷으로 검색하며, 혹시나 실수를 하면 어떡할까 고민하느라 잠을 못 잤다. 몸도 긴장했는지 빨간 손님이 열흘먼저 찾아왔다. 연습장에서 그렇게 연습했는데 막상 잔디를 밟으니 가만히 있는 공을 치지 못했다. 점수를 세는 건 고사하고, 열 개가 넘는 공을 잃어버리는 동안 정신이 빠져서 넋 나간 사람의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


필드에 나가면 아무리 못 쳐도 한 번은 기가 막히게 맞는 공이 있다.  오잘공이라 부르는 그 공만 생각한다. 머리를 들고, 몸이 빠르고, 손목을 쓰고, 중심을 잃고, 프로가 하지 말라는 것을 다 하면서 왜 안 되지?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툭 쳤는데 쫙 날아간다. 친 나도 놀라고, 보던 사람들도 신나서 나이스를 외친다. 이렇게만 치면 금방 싱글이 될 것 같다. 


 문제는 욕심이다. 잘 쳤던 기억을 갖고 똑같이 치려고 하다 보면 혹은 더 잘 치고 싶어지는 순간 온몸에 욕심이 달라붙는다. 덕지덕지. 몸이 덤벼들고, 손이 빨라진다. 날아가는 공을 볼 생각에 눈은 이미 왼쪽으로 돌아섰다. 얼마나 잘 쳤는지 확인하려면 몸을 세워야 한다. 골프는 머리를 드는 순간 끝이다.


무한반복이다. 실수하고, 잘 치고, 또 못 치고, 잘 맞고, 그러다 감을 잡았다고 느끼는 순간에 경기는 끝이 나고, 아쉬움에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운 좋게도 내게는 좋은 골프친구가 있다. 부부동반인 우리 팀은 명랑골프를 좋아한다. 친구의 남편은 싱글이지만, 이상하게 우리랑 같이 치면 인간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아무래도 우리셋에게 말려드는 모양새다. 잘 치는 사람들과 치면 나도 긴장해서 점수가 잘 나온다. 비싼 돈을 내고 가는데 놀다 올 순 없으니 그것도 맞다.



남편이랑 이 친구를 만나면 일단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힘이 덜 들어간다. 처음 골프를 시작했을 때의 모습을 잘 알고 있어서 좋아진 것만 보인다. 같이 고생했던 사이여서 그런가. 조금만 잘 쳐도 나이스를 목놓아 외친다. 


어제 오랜만에 공치러 갔다 왔다. 아침시간이라 잔디에 이슬이 가득했다. 바지밑단이 젖어 걸을 때마다 신경 쓰였다. 캐디언니가 양말 속에 바지를 담으라고 했다. 나는 한 번도 안 해봤다고 했더니 누가 본다고 그러냐며 편한 게 제일이라고 했다.  바지를 양말 속에 넣고 보니 제법 괜찮았다. 


캐디언니가 기다리는 동안 사진이나 찍자고 했다.  사진을 먼저 찍어주겠다고 말하는 캐디언니는 처음이었다. 우리 보고 서 있기만 하면 모델포스로 만들어준다고 큰소리치길래 긴가민가 했는데, 사진을 보는 순간 입이 쫙 벌어졌다. 스노앱 없이 다리가 길어지고, 얼굴이 작아지는 마법을 부렸다. 이 분은 찐이구나. 싶어서 담부터는 캐디언니말에 복종했다. 덕분에 예쁜 사진을 건져서 기분이 좋았다.


기분이 좋으니 공이 잘 맞기 시작했다. 실수하면 캐디언니가 일타강사처럼 건네는 말에 집중했다. 캐디언니는 적당히 치고 빠지는 말기술이 있었다.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지 않으면서, 잘못을 스스로 깨닫게 만들었다. 농담처럼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지만. 다시 만나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 


가끔 필드에서 지나치게 훈수를 두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물론 내가 못 치는 걸 안타까워서 그렇겠지만, 한 번 칠 때마다 쫓아다니며 이것저것말하면 혼란만 가중될 뿐 도움이 안 된다. 안 그래도 못 쳐서 속상한데, 그럴 줄 알았다느니, 왜 고개를 드냐느니, 몸이 벌떡벌떡 일어선다고 바로 지적하면 채를 집어던지며 나 안 해. 하고 싶어 진다. 그러다 보면 경기는 점점 꼬이고, 시간이 더디 간다.


어제는 정말이지 완벽했다. 너무 간지럽지만 내가 긁을 수 없는 등 어딘가를 딱 집어 긁어줄 때 소름이 끼치는 것처럼 캐디언니는 핵심을 찔러줬고, 덕분에 나는 오랜만에 나갔지만,  공은 앞으로 보낼 수 있었다. 시간도 빨리 가서 18홀이 끝나자 아쉬웠다. 



중간에 비가 왔지만, 날은 춥지 않아서 경기를 무사히 마친 것도 감사했다. 모든 것이 잘 맞아떨어진 하루였다. 이런 날은 꼴찌라도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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