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남자를 뻠뿌라고 불렀다. 뻠뿌는 펌프의 일본식 발음이다. 38년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살다 온 할머니는 한국어보다 일본어를 더 잘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동문서답식의 대답을 할 때마다 뻠뿌가 고장났다는 말을 자주 했다. 아이들은 뻠뿌라는 말을 하고 낄낄댔다.
국민학교에서 아이들은 친구들의 이름 대신 별명을 불렀다. 어른들의 말 중에 귀에 꽂히는 단어들을 기억했다 어울림직한 아이들에게 붙였다. 흔하고 웃긴 단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어울리는 별명을 짓기란 생각보다 어려웠다.
팔보는 체육 시간에 뜀뛰기를 하다 치마가 뒤집힌 경미에게 붙은 별명이다. 귀껏은 가끔 이상한 소리 하고, 말귀를 못 알아듣던 아랫동네 철희였다. 붕태는 몸이 크고 밥을 많이 먹는데, 줄다리기 때 힘을 못 썼던 동희였고, 뚜럼은 농지거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화를 내곤 했던 철수였다.
우리는 별명을 지을 때 심각하게 고민했다. 여러 낱말을 놓고 그 사람과 어울리는지 저울질했다. 한참 고민해도 답이 안 나올 때쯤 누군가 듣자마자 웃음이 터지는 말을 내뱉는다. 한번 들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놀리는 것 같은데 딱히 틀린 것 같지도 않은 별명으로 서로를 불렀다.
시간은 팔보를 대학교수로, 귀껏을 택시기사로, 붕태를 식당 사장으로 만들었다. 종일 같이 어울려 다녔던 초등학교 친구들이 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수소문해서 찾을 정도는 아니지만, 어떻게 사는지 소식이 궁금한 친구들이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
-시골 출신인 게 티나네.
친구들이랑 주말이면, 산으로 들로 삼동 따러 다니거나, 잠자리를 잡으로 다녔다는 얘기를 하자 남편이 말했다.
-당신은 어렸을 때 별명이 뭐예요?
연희가 입술을 몇 번 실룩이더니 반박하듯 물었다.
-별명? 없어.
-정말? 그럼 지금까지 연락하고 있는 초등학교 친구는 있어요?
-반창회는 하는 것 같은데, 난 안 나가봐서 모르지.
-친구가 없구나.
남편이 대답하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우리가 뻠뿌라고 부른다는 것을 몰랐다. 일주도로가 다니는 사거리 끝에 초등학교가 있었다. 학교에서 나오면 남북으로 하얀 시멘트길이 있었는데, 길 양옆으로 집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길 옆으로 경운기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의 작은 골목들이 여기저기 뻗어 나갔다. 큰길이라고 해도 차 두 대가 마주 오면 걸어가던 사람들은 길가에 바짝 붙어야 했다.
남자는 학교가 마칠 때쯤 위에서 내려왔다. 남자가 지나가면 우리는 담벼락에 붙거나 다른 곳을 보는 체했다. 남자는 멀리서부터 우리가 보이면 웃었다. 키가 크고 이목구비도 커서 웃으면 입이 더 크게 보였다. 자신을 피하는 티를 아무리 내도 남자는 웃었다. 뻠뿌라는 별명이 딱 맞았다.
그 사람이 뻠뿌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연희는 고개를 돌렸다. 마을회관에서 치러진 숙희 아버지의 장례식에는 조문객들이 많았다. 숙희의 6형제 앞으로 보내온 화환이 장례식 입구에 수십 개였다. 숙희는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연희와는 어렸을 때 앞뒷집에 살아서 친하게 지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친구들 10명이 모임을 만들었다. 경조사 때 서로 챙겨주자는 게 모임의 취지였다. 연희네 모임에서는 화환과 개인 부조, 모임 부조가 나갔다. 당신이 만일 누군가의 마음을 알아보고 싶다면 경조사 때 당신이 받은 봉투를 열어보면 된다. 상대가 나에게 쓰는 돈의 액수가 곧 그 사람의 마음이다.
오랜만이야.
그러니까. 너 모임에 안 나온 지 꽤 됐지?
일 년 정도 못 나갔지. 그래도 모임비는 꼬박꼬박 자동이체로 나가.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이럴 때나 얼굴 보고. 좀 그렇다.
검은 상복을 입고, 떡진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숙희가 앞에 앉자마자 말을 꺼냈다. 화장하지 않은 숙희의 눈가에 기미가 넓게 퍼져 있었다. 연희는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상 위에 놓인 성게미역국을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막둥이가 조금만 더 크면 그때부터는 잘 나올게.
-아이들은 오후 늦게 와서 저녁까지 있는다고 하던데, 얘기 들었지?
-응, 너는 못 있는 거지?
-미안해.
-미안하긴. 어쩔 수 없지. 많이 먹어.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나 잠깐 저기 갔다 올게.
숙희가 허리춤에 찬 가방의 지퍼를 열어 안을 확인하고 자리를 떴다. 연희는 짭조름한 미역국을 몇 번 떠먹는 체하다 숟가락을 놓았다. 네 사람이 앉게 되어 있는 식탁에 손도 대지 않은 돔베고기와 순대 두부와 밑반찬들이 있었다. 누군가 연희 앞에 방울토마토가 든 접시를 놓고 갔다. 아는 사람인가? 하며 봤는데, 다른 식탁에도 갖다 놓는 게 보였다. 연희는 먹지 않은 음식이 아깝다고 생각하며, 가방에서 봉투를 꺼냈다.
-많이 먹었어?
저쪽에 있던 숙희가 어느 틈엔가 연희의 앞에 앉았다.
-뭐 더 줄까? 고기 더 갖다 줄까?
-아니야. 됐어. 힘들지?
-힘들긴 뭐.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래도 아버지가 오래 고생 안 시키고 빨리 가셨어.
- 얼마나 됐다고 했지?
-쓰러지고 6개월? 다행이다. 그렇지?
-그럼. 긴 병에 효자 없다고. 6개월이 딱 좋아. 그래? 갑자기 돌아가시면 식구들한테 상처가 돼. 경황없이 보내고 나면 그렇게 후회되는 것만 생각나고 아쉽고.
-그래. 네가 그랬지.
-그런데 또 오래 누워 있어 봐. 병원비에 간병비에. 그게 다 짐이 될 거 아냐.
-그렇지. 아버님이 정말 자식 생각하셨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숙희가 말을 마치고 연희를 쳐다봤다. 연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봉투를 건넸다. 숙희는 봉투를 가방에 담더니, 안쪽에 있는 방에서 두루마리 화장지를 가져와 상품권과 함께 건넸다.
-뭘 이런 걸. 다.
-친구 거는 내가 챙겨야지.
연희가 왼손에 두루마리 화장지를 들고 식당을 나왔다. 숙희가 문 앞에서 어서 가라며 손을 몇 번 흔들다 들어갔다.
식당 옆 공터에서는 아저씨들이 멍석을 깔고 윷놀이를 하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던 남자 몇이 연희를 힐끔 쳐다봤다. 연희와 눈이 마주쳤다. 연희는 이방인처럼 무심하게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김 씨 아저씨와 은경이네 오빠. 숙희 삼촌이었다. 구두 소리가 천천히 따라왔다.
연희 아버지는 동네에서 유명한 노름꾼이었다. 남의 집 잔칫날이나 상갓집에 제일 먼저 가서 가장 늦게 나왔다. 손에 감기는 작은 종자기에 대나무를 깎아서 만든 4개의 윷을 던지며 노는 윷놀이는 단순한 전통 놀이가 아니었다. 윷놀이 한판에 있는 돈이 다 털렸고, 집문서와 땅문서가 오갔다. 한밤중에 자고 있으면 아버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자는 어머니를 발로 깨웠다. 돈이 어딨냐. 없으면 어디 가서라도 꾸고 와. 더 꿀 데도 없다. 소리가 나오고 아버지의 매질이 시작됐다. 어머니는 한참을 맞고 나서야 이불속 깊숙한 곳에서 돈을 꺼냈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을 억세게 잡아당겨 돈만 빼갔다. 어차피 줄 거 처음부터 줬으면 맞지는 않았을 건데. 왜 엄마는 꼭 버텨서 매를 버는 건지 연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나갈 때는 돈을 들고나갔지만 들어올 때는 항상 빈손이었다.
연희는 시동을 걸며 혀를 찼다. 나이가 들어도 옛 버릇을 못 고치는 사람들. 변화하지 않고 고인 채 늙어가는 사람들에게 썩은 내가 나는 것 같았다. 고향은 무슨.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하면 시내에 산 지 벌써 30년이 넘었는데. 여기 산 세월보다 나가 산 세월이 훨씬 많은 곳을 고향이라고 불러야 할까. 만날 때마다 죽고 못 살 것 같이 구는 고향 친구들은 정작 연희가 필요할 때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외면할 수 없는 건 아직 어머니가 고향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고집이 세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우리 집에 오면 맘 편히 살 텐데.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혼자 살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연희는 어머니 생각이 미치자 핸들을 돌렸다. 열흘 전에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큰소리쳤던 곳이었다. 그때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생각보다 넘치게 행동했다. 큰딸의 표현을 빌리면 오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