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오후 3시. 3

by 레마누

실은 나도 그런 친구가 있는데 그 보살 소개해 줄래?

뭐야? 네가? 누군데?

너는 잘 몰라. 고등학교 친구라.

그래? 무슨 일인데?


그 친구가 자꾸 꿈에 나와. 꿈에서 노래방에 가고, 시청에서 쇼핑도 하는데 친구의 표정이 너무 슬퍼 보여. 꿈에서도 그게 신경 쓰여. 살았을 때도 말이 없었는데 죽어서도 조용히 내 옆에만 있어. 차라리 나를 미워했으면 좋겠는데 화를 내거나 해코지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그냥 가만히 있는 거야. 착한 사람이 죽으면 귀신도 착한 건가 봐. 그런데 난 그것도 속이 상해. 보살 만나서 나도 굿하면 좋아질까? 꿈꾸지 않으면 내 죄책감이 조금 사라질까?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뭘 잘못했는데?


나는 몰랐어.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몰랐다는 게 변명이 될 수는 없지만 정말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어. 단지 내 생각을 더 많이 했을 뿐야. 원래 사람이란 게 그렇잖아. 다른 사람이 아무리 큰 병에 걸려도 내 손가락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픈 거 아냐? 그게 나쁜 건 아니잖아. 잘못도 아니잖아. 아무리 고등학교 친구여도 매일 같이 다녔던 절친이라도 스무 살을 넘으면서 서로 멀어질 수도 있는 거 아냐?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할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누가 뭐래도 절친이었어. 나는 자취를 했고 친구는 부모님과 살고 있었거든. 가끔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갔지. 친구는 말이 없었지만 한 번도 내가 하자는 걸 거부한 적이 없었어. 팥빙수가 먹고 싶다면 한겨울에도 커피숍을 찾아다녔고, 스트레스가 쌓였다고 노래방에 가자고 하면 빙그레 웃으며 좋다고 했지. 친구가 팥을 싫어하는 것도 노래를 잘 못 부른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게 뭐.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잖아. 친구는 싫다는 말을 안 했어. 그러면 좋다는 거 아냐? 아닌가? 모르겠다.


사귀던 남자아이의 친구나 선배를 부지런히 소개해 줬지. 나만 사랑에 빠지고 싶진 않았으니까. 너도 이제 좋은 사람 만나야지. 하는 마음이었어. 정말이야. 나는 친구가 사랑하고 사랑받길 원했어. 나처럼 너도 행복하라는 말을 한 적도 있었어. 그 친구한테는 이상하게 말이 바로 나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웃는다는 걸 알고 있었어. 고등학교 때는 화장실에 손잡고 가고, 급하면 같이 들어간 적도 있었지만 그건 다 어렸을 때 얘기잖아. 가슴이 커지는 속도만큼 나는 남자들한테 관심이 갔어.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솔직히 친구한테 연락을 안 할 때도 많았어. 사귀다 깨지면 친구와 맥주를 마시며 펑펑 울기도 했고. 다 그런 거 아냐?.


친구는 내가 연애를 하고, 결혼하는 동안 늘 혼자였어. 나는 연애하고, 적당한 나이에 결혼했지. 친구는 오름 동호회에서 만난 남자와 잠깐 만났는데 잘 안 됐나 봐. 사실 어른들의 연애는 소꿉장난이 아니잖아. 손만 잡고 자자는 말을 해도 그게 어디 되는 말이지? 그냥 말만 그렇게 하잖아. 친구는 그런 걸 이해하지 못했어. 순수하지 못하다는 말로 남자들을 밀어냈지. 서른이 넘어가는 여자가 손 잡는데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면 누가 믿겠어?


조신하고 참한 거. 좋지. 좋아. 그런데 선물 포장지를 뜯어야 내용을 볼 거 아냐. 포장지가 아무리 예뻐도 포장지는 포장지일 뿐이지. 아깝다고 안 뜯어봐? 포장지가 궁금한 게 아니잖아. 내용물이 중요하지. 일단 손을 잡으면 꼭 안아도 보고, 뽀뽀도 하고 그러다 둘만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술기운을 빌든 막차 핑계를 대든 어떻게든 방법을 찾잖아. 앞에서는 다 조신하지만 어깨동무하고 걸어오는 커플들이 손만 잡지 않는다는 거 알잖아. 알지? 그럼.


결혼하고 쌍둥이를 낳은 동네 친구가 하루는 이런 말을 하드라. 아기를 낳고 보니 거리에서 보이는 임신한 여자들이 다 나와 똑같구나. 싶었대. 나처럼 저 여자도 할 짓 안 할 짓 다 하고 아이가 생겼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야. 뭐야. 왜 그런 생각을? 그러니까. 그런데 또 그 친구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 사랑한다고 말하면 아름다운데 잤다고 하면 징그러워? 섹스는 야하고, 잠자리는 젊잖은 거야? 그건 또 무슨 식인데? 뭐. 일단은 신문지에 싼 장미보다는 예쁘게 포장된 꽃다발이 보기는 좋으니까. 똑같은 거라도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대학 때 사귀었던 남자아이가 있었어. 둘 다 아르바이트하느라 만날 시간이 없었거든. 그런데 남자아이가 시간이 비는 잠깐이면 꼭 호프집에 들렀다 갔어. 네가 일하는? 응. 왜? 지나가다 샀다면서 신문지를 내미는데 그 안에 장미가 있었어. 돈이 없는 날은 한 송이였고, 어떤 날은 스무 송이의 빨간 장미가 있었지. 그게 그렇게 좋더라. 날 생각하며 그걸 샀을 거 아냐. 포장하는 걸 보면서 좋아할 날 떠올렸을 거고. 오늘은 무슨 색 장미를 살까? 고민도 했을 거야. 나는 노란 장미를 제일 좋아했는데 그게 또 빨간 장미보다 비싸요. 비싼 게 예쁘긴 하지.


아, 맞다. 나 예전에 정말 웃긴 일 있었는데. 뭔데? 장미 하니까 생각났어. 우리 때 종이로 장미 접는 거 대개 유행이었던 거 기억나? 그럼, 꽃집에서 포장도 해 주고 그랬잖아. 그러니까. 동생이 좋아하는 남자한테 준다고 파란 장미를 접었어. 파란 장미? 응. 진짜 진한 파란색. 꽃말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데. 그게 순정만화에 나왔던 얘기라 동생이 꽂혔었거든.


파란 장미를 100송이 접고 시내에 있는 꽃집에 들고 갔어. 포장해 달라고. 그런데 꽃집 사장님이 계속 나를 보며 말을 거는 거야. 이거 다 접는데 얼마나 걸렸어요? 솜씨가 너무 좋으세요. 남자친구 줄 거예요? 하면서. 나는 심드렁하게 서 있었는데 옆에 있던 동생 귓불이 빨개졌어. 언제나 그런 식이었어. 사람들은 머리가 길고, 몸이 작은 나를 보면 여성스럽다고 말하지. 동생은 키가 크고 쇼트커트였거든. 정작 손재주가 좋고 아기자기한 건 동생이었는데 말이야. 겉모습만 보고 단정 짓는 거야. 난 그게 싫어.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 맘대로 생각하는 거.


그보다 더 심한 게 뭔지 알아? 내가 다 맞다는 사람. 아. 진짜. 그런 사람은 답도 없지. 그러니까. 우리는 진짜 그런 사람 되지 말자. 그래. 혹시라도 내가 꼰대처럼 말하면 꼭 지적해 줘야 돼. 기분 나쁠 텐데? 원래 몸에 좋은 약이 쓰고, 바른말은 듣기 싫은 거야. 오케이. 기억할게.


그런데 친구는 어떻게 됐어? 누구? 아까 서른이 넘도록 연애하지 않았던, 못 했다고 했나? 아냐. 그 친구는 안 한 거야. 자기가 밀어낸 거지. 얼굴이 얼마나 예뻤는데. 피부가 하얗고 눈이 새까맣게 빛났어. 웃을 때 왼쪽에만 생기는 보조개도 예뻤고, 특히 덧니가 매력적이었어. 크게 웃을 때만 볼 수 있었는데 가끔 난 덧니로 친구의 기분을 파악하기도 했다니까.


결혼식 날 제일 먼저 왔어. 환하게 웃으며 축하한다고 말했지. 결혼하자마자 임신했을 때도 친구는 자주 놀러 왔어. 아, 맞다. 내가 임신 8개월 때 화상을 입었었거든. 정말? 응, 한여름이었는데 팔팔 끓인 보리차를 유리병에 넣다가 유리병이 깨지면서 뜨거운 물이 허벅지에 다 튄 거지. 급하게 화장실에 가서 샤워기를 틀고 찬물을 뿌리는데 악소리가 절로 났다니까. 남편에게 전화했더니 올 수 없다면서 한다는 소리가 뜨거운 걸 유리병에 담으면 안 된다는 것도 몰랐냐는 거야.


요즘 아이들은 그런 사람을 T라고 한다며? 난 완전 극 F거든. 어찌나 화가 나던지. 전화를 팍 끊어버렸지. 그리고 친구한테 전화했어. 마침 근처에서 일하는 중이라면서 금방 달려오더라. 그 친구랑 피부과에 갔어. 3도 화상 진단을 받았어. 한 달 넘게 화상치료를 했는데, 태어난 아이의 오른쪽 볼 아래에 커다랗고 번진 형태의 점이 있는 거야. 의사 선생님은 상관없다고 말해도 괜히 그때 화상 때문에 그런 것 같아서 아이 볼 때마다 미안해.

첫애 돌잔치에도 친구는 제일 먼저 와서 식당 직원들처럼 일했어. 나는 아이 보느라 정신이 없었거든. 잠깐 짬이 났을 때 내가 해 준 소개팅 남자 어땠냐고 물었지. 친구는 그냥 그랬다고 하더라고. 세상에 딱 맞는 사람이 어디 있니. 네 나이도 생각해야지. 조금 있으면 마흔 넘은 남자밖에 안 남는다. 이것저것 재지 말고 웬만하면 일 년은 만나봐. 일단 사람을 사귀어봐야 긴지 아닌지 알 거 아냐. 응?


그날은 왜 그랬는지 몰라. 어쩌면 나 혼자만 결혼하고 아이 돌잔치를 치르는 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랬는지도. 친구도 나처럼 안정적인 삶을 살았으면 했어. 적당히 타협하고 양보하고, 눈 감으면서. 제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니. 사는 게 다 그렇지. 오죽하면 찰리 채플린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했겠어. 적당히 맞춰 사는 거야. 좋은 척도 하면서 싫은 티는 살짝 감추기도 하면서 그렇게 살아도 되는데. 그게 안 되는 사람이었어. 그 친구는.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안 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이십 대 때야 그렇게 살지 않아도 돼. 꼿꼿하게 고개 들고, 찬바람에도 꽃을 피우겠다는 마음으로 살아도 돼. 단단한 바윗돌이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조약돌이 되듯이 사람도 시간이 흐르면서 적당히 둥글게 변하잖아. 친구도 그럴 줄 알았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걸 보고 재촉한 거고. 그날 내가 한 말 때문이었을까? 내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만한 영향력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겨우 버티고 있는 친구를 말 한마디로 툭 밀어버린 건 아니었을까?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그날 친구는 덧니가 보이지 않게 웃었거든.


삼일 후에 난 친구의 영정 사진 앞에 서 있었어. 나랑 놀러 갈 때 입었던 아이보리 블라우스를 입고, 덧니를 드러내며 웃는 친구의 얼굴 옆에 검은 줄이 쳐져 있었어. 친구의 언니가 핸드폰에 있는 사진 중에서 고른 거라고 하는데, 내가 찍어준 사진이었거든. 그날 환하게 웃는 친구에게 예쁘다는 말을 백 번은 한 것 같아. 돌 지난 아이를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결혼하고 처음으로 남편과 떨어져 이틀을 보냈어.


요즘 그 친구가 자꾸 꿈에 나와. 나는 늙었는데, 친구는 여전히 고등학생이야. 얼굴은 희미한데 친구라는 건 알아. 그 아이가 꿈에서 나를 보며 웃어.


혹시 네 마음이 친구를 부르는 건 아닐까? 그게 무슨 소리야? 친구가 왜 죽었는지는 알았어? 잘 몰라. 장례식장에서 친구의 언니가 무슨 말인가를 했지만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 나는 생각보다 그 친구에 대해 잘 몰랐다는 것만 알고 왔지. 나와 만날 때도 속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그래서 네 마음이 불편했겠구나. 그랬나? 나는 그냥 넘겨짚었던 것 같아. 별 일없이 사는구나. 무탈한 집이구나. 하고. 우리 집이 안 그랬으니까. 내 짐만으로 버거워서 친구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어.


어쩌면 네 마음이 그 친구를 부르고 있는 건지도 몰라. 꿈에서라도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을 달래는 거지. 친구가 어딘가에서 잘 살아야 네 속이 조금이라도 편한 것 같아서.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니까. 그렇지. 그런 거 같기도 하다. 그래. 그러니까 보살 찾아가지 마. 괜찮을 거야. 너는 아무 문제없잖아. 남편 사업도 잘 되고, 아이들 잘 크고 있고. 그 정도면 아주 훌륭합니다. 뭐야. 그런 형식적인 말은? 그런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냐? 어머, 벌써 3시야? 우리 얘들 끝났겠다. 학교로 갈 거지? 응. 그래, 그럼 우리 다음에 보자. 그래, 얼른 가.


커피숍에 있던 사람들이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의자를 밀며 일어섰다. 빈 잔만 남은 쟁반을 카운터에 반납하고 주차장에서 빠져나간다. 만날 때는 심각한 표정으로 열 내며 이야기하지만, 돌아서자마자 저녁거리를 생각한다. 월요일 오후 3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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