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아는 기쁨

by 레마누

성산일출봉이 있는 곳이라 해돋이명소로 유명한 바닷가 근처에서 남편은 일을 하고 있다. 우리 가족은 해마다 12월 31일이면 성산에 간다.


매일 뜨고 지는데 새해 첫날에만 호들갑을 떨며 본다. 그동안 해가 뜨지 않았던 것처럼 마치 오늘이 처음인 것처럼 마음을 졸이며 기다린다. 구름이 있으면 실망하고, 해가 구름을 뚫고 나오면 환호성을 지른다. 어제는 하늘 한 번 본 적 없으면서.


해 뜨는 걸 보며 아이들이 소원을 빈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간절한 무언가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어제도 내일도 있지만 오늘만 기도한다. 새해 첫날이니까.


문득 작년의 나와 올해의 나는 무엇이 다를까 생각했다. 작년에도 똑같은 장소에서 해돋이를 봤다. 나는 그때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분명 변화가 있었다. 무엇일까?


나는 연초에 올해는 꼭 소설가로 등단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단편소설을 6편 썼다. 창작노트에 소설구상을 했다. 인물을 설정하고, 배경을 그려 넣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하지만 나는 등단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실망하거나 포기할 생각은 없다. 마음이 든든해졌기 때문이다. 서랍 안에는 소설의 씨앗들이 자라고 있다. 물을 먹고, 햇빛을 쬐면 무럭무럭 자랄 아이들이 있다. 소설로 쓰진 않았지만, 매일 생각하며 마음으로 굴려보는 이야기들이 점점 형태를 갖춰가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그들이 세상밖으로 나오는 걸 기다리며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올해 나는 팔 굽혀 펴기 10개와 턱걸이 한 개를 성공할 예정이다. 학교 다닐 때 체력장에서 매달리기 1초로 우리 반 꼴찌였다. 하체운동을 좋아해서 헬스장에서도 하체운동만 한다. 상체운동은 재미가 없다. 하지만 상하체의 균형을 위해선 상체운동이 꼭 필요하다. 그래서 도전하기로 했다. 하기 싫은 것, 재미없는 것, 하지만 필요한 것 혹은 그래도 꼭 한 번은 해 보고 싶은 것.



처음에는 눈금 6에 바를 올리고 시작했다. 헬스장에 가자마자 팔 굽혀 펴기 100개를 한다. 처음에는 20개 하고 쉬었다. 지금은 25개까지 하고 쉰다. 눈금도 점점 내려갔다. 해보니 할 만하면 한 칸씩 내린다.


낮은 곳에서 시작했다면 힘들어서 포기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100개를 할 생각 하면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욕심을 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매일 하다 보면 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나니 오늘은 11까지 내리고 싶어졌다. 할수록 욕심이 생긴다. 자신감이 붙으니 용기가 따라와 도전을 부추긴다.


운동을 하면서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폼나게 친구들에게 내 책을 뿌리며 으스대고 싶었다. 내가 아직 죽지 않고 건재함을 과시하고 싶었다. 가장 중요한 소설은 쓰지 않고, 시상식에 입을 옷을 고민하고, 살 뺄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소설을 잘 쓰고 싶었다. 독서라면 나도 남부럽지 않게 했으니 쓰기만 하면 술술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낑낑대도 한 문장 쓰는 게 어려웠다. 소설 작법서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더 혼란스러웠다. 첫 문장이 기가 막혀야 하는데 어떤 글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나에게 화가 났다.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인간이면서 허황된 꿈만 꾸는 게 한심했다. 부끄러움이 뒤따라와 틈만 나면 얼굴이 빨개졌다. 보이는 것만 신경 쓰느라 정작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잊고 살았다. 글을 쓰며 나는 한없이 겸손해졌다.


그때 다시 운동이 말했다. 네가 처음 헬스장에 들어온 날을 기억하라고. 사용법을 모르는 운동기구들을 하나씩 해보며 몸에 익히고, 너에게 맞는 무게를 찾아가는 과정이 지금 너를 성장시켰다는 것을 잊었냐고 물었다.


나는 욕심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신인 때는 원래 버버벅하는 게 맞다. 어리바리하고 삐그덕 댄다. 신인이 너무 능숙하게 잘하면 그것도 별로 재미없다.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하자.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고, 어려우면 도와주세요 손을 내밀자.



나를 좌절시키고 힘들게 했던 글이 다시 일어설 힘을 준다. 이야기는 계속되고, 꿈은 여전히 저 멀리 있다. 꿈이 있는 한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작은 성공에 기뻐하며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베짱이는 행복하다. 거창하지 않아도 눈에 띄게 변화하지 않아도 나만 아는 기쁨이 있다면 그래도 세상은 살아갈 만하지 않을까? 오늘도 나는 성공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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