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글쓰기 N0.4
세상에서 보고 싶은 변화가 있다면 스스로 그 변화가 되어야 한다 -마하트마 간디-
비가 그치자 산 위에서 졸졸졸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신나게 내려오는 시냇물의 노랫소리가 높게 퍼져나갈 때 어디선가 화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누가 이렇게 노래를 부르는 거야? 아침부터 기분 나쁘게.
-안녕하세요. 저는 졸졸 이 시냇물이라고 해요.
깊게 파인 땅에 탁하고 냄새나는 고인 물이 보였다.
-거기 있으면 답답하지 않으세요? 저와 같이 갈래요?
-뭐 하러? 귀찮게.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저랑 같이 바다로 나가요.
-아무 일 없는 여기가 좋아. 신경 쓸 일도 없고, 건드리는 것도 없어. 안정적이야. 나는 여기서 꼼짝도 안 할 거야.
-깨끗해지면 친구도 많아질 거예요
- 참견하고 비위상하는 말만 하는 것들 필요 없어.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빨리 지나가. 시끄러워 죽겠으니까.
졸졸이는 고인 물을 한참 쳐다보다 내려갔다. 고인 물은 눈과 귀를 닫고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시냇물이 개울을 지나 강을 건너 바다로 나가는 동안, 고인 물에는 쓰레기와 오물이 점점 쌓였다. 졸졸이가 바다가 되는 순간 고인 물은 흙에 파묻혀 사라졌다.
<2025 트렌드 코리아>에 나온 키워드 중에 '옴니보어'라는 단어가 있다. '옴니보어'란 집단의 경계가 사라지고 개인의 취향이 또렷해진다. 는 의미다. 예를 들어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 오픈 채팅방에 대학생과 주부, 고등학생과 직장인들이 모두 한마음이 되어 '선재'를 응원했던 것처럼 성별과 나이, 직업의 경계가 사라지고, 개인의 취향이 더욱 뚜렷해진다. 예전같으면 좋아해도 나이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뒤에 물러서 있었던 사람들이 앞장서서 문화를 만들고, 주도한다.
나이와 직업에 맞는 정해진 이미지가 있었다. 아줌마는 뽀글파마와 늘어진 면티, 아저씨는 배 나오고 술 마시고, 불량 청소년은 머리색이 요란하고, 모범생은 뿔테안경을 낀다. 요즘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봐서는 짐작이 어렵다. 하는 말과 쓰는 단어에서 살짝 나이가 보일 때가 있지만, 관리 잘한 50대는 예전 50대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트렌드에 민감하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나이를 떠나 할 얘기가 많다. 멋있으면 다 언니, 오빠라며 응원봉을 흔드는 내 친구는 언제나 바쁘다. 친구는 시댁이나 남편일로 스트레스받을 시간이 없다. 오빠들을 보며 위안을 받는다는 친구는 50 포기의 김장을 거뜬하게 해내고, 제사 명절을 혼자 차리는 맏며느리다.
정신없이 변하는 세상에서 혼자만의 우물에 갇힌 사람은 외롭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졸졸이가 손을 내밀 때 고인 물은 밖으로 나올 기회가 생겼다. 나오려면 막고 있는 장애물을 치워야 하는데 그게 귀찮고 힘들어서 가만히 있는다. 누가 와서 해 주면 나가고, 아니면 말고 식이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고인 물은 모른다.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도 모른다.
고인 물이 밖으로 나오려면 젖 먹던 힘까지 끌어와야 하지만,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 애쓰게 했는데 정작 졸졸이와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하는 두려움도 행동을 막는다. 남들이 하는 것을 보며 나도 해 볼까? 가 아니라 나는 못 해 소리를 먼저 한다. 해 보지 않으면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데 지레짐작으로 몸을 움츠린다. 도전을 해야 바뀐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고, 도전하는 자만이 성공한다.
마흔에 낳은 막둥이와 대화하려면 스키즈가 부르는 노래 제목은 척하면 척하고 알아차려야 한다. 문방구에 서 모루인형 만들기 키트를 사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포장하고, 보드게임을 익혀서 저녁 시간을 보내야 한다. "엄마도 검정 고무신 신고 학교 다녔어?"묻는 아이들과 말을 하면 "그게 뭐야?"소리밖에 나오지 않는다. 모르는 것투성이다. 아이들은 그런 나를 보며 쯧쯧거리면서도 자세하게 가르쳐준다. 아이들이 나를 키우고 있다.
우리 집 세 남매는 바보 같은 엄마에게 서로 가르쳐주고 싶어 한다. 큰 딸은 에스파 언니들의 춤을, 아들은 캐치핑에 나오는 캐릭터의 이름들을, 막둥이는 스키즈 오빠들의 이름과 얼굴을 매칭시키는 문제를 자주 낸다. 매일 테스트를 본다. 덕분에 나는 늙을 틈이 없다. 배워야 할 게 너무 많다. 감사한 일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쫓아만 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 나만의 기준이 있고, 중심이 정확하며, 나의 현재 상태와 능력을 파악해서 적당한 걸음걸이로 세상 위를 걸어가기. 그것을 매일 독서와 글쓰기로 배우고 있다. 이 또한 감사한 일이다. 감사한 일이 많이 있음을 감사하며, 겨울방학을 즐겁게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도 방학이 한달이나 남았다. 우리 집에서 개학을 제일 기다리는 건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