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구멍

매일 글쓰기 No.3

by 레마누
나는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을 사랑한다. 시련이 닥치면 그것들이 나를 지탱하는 원천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 오스카 와일드-


-언니, 그거 꼭 사야 돼?

설을 앞두고 동생들과 친정집에 내려가 청소를 했다. 여자가 떠나고 일 년만의 일이다. 엄마와 아빠가 젊고 힘이 넘칠 때 지어진 집은 동네에서 제일 마당이 크고, 넓었다. 잔디마당 위로 계단을 올렸고, 현관을 넓게 만들었다. 여름이면 그늘진 현관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집 옆으로 과수원이 있는데, 가을이면 귤이 노랗게 익었다. 잘 다듬어진 정원과 귤을 보고, 길을 지나가던 관광객들이 차를 세우고 들어와 사진을 찍었다.


우리의 자랑인 집은 그러나 망국의 성터가 되었다. 여자는 살림에 관심이 없었다. 개 6마리를 집에서 키웠다. 개와 같이 안방에서 잤다. 아빠는 동생이 쓰던 작은 방에서 남동생이 쓰던 싱글침대를 썼다. 그게 보기 싫어 내려가지 않았다. 내려갈 때마다 아빠는 괜찮다고 해서 괜찮은 줄 알았다.


말을 꺼내기 전에 동생들이 싫다고 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들었다. 일은 이미 벌어졌다. 아빠와 우리 사이는 멀어질 대로 멀어졌다. 그런데 왜? 잘못은 여자가 했는데, 왜 우리가 서로를 미워하고 원망하며 모진 말을 서로에게 퍼부어야 할까? 동생들이 싫은 기색을 보이면 이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고맙게도 둘 다 흔쾌히 알았다고 했다.


집은 엉망이었다. 아빠는 물 한잔도 혼자 떠먹지 않는 사람이다. 옷을 정리하는 법도, 바닥을 쓸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인 건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지저분했다.


둘째는 부엌을 막내는 화장실을 나는 아빠방을 맡았다. 세 시간 동안 쓸고 닦는데만 전념했다. 담뱃재는 침대를 중심으로 어디에나 있었다. 이불을 걷어내 세탁기에 돌리고, 유리창을 열어 방에 벤 담배냄새를 밖으로 내보냈다. 책상을 정리했다.


곰팡이핀 벽을 매직블록으로 닦았다.

-우리 엄마가 벽지는 잘 골랐어. 정말. 막내 결혼할 때 도배한 거잖아. 그때 실크벽지라고 해서 비싸게 했는데. 닦으니까 좀 낫지?

유리창을 닦고

-유리창이 깨졌어. 조심해

바닥을 닦고

-아무리 닦아도 닦아도 먼지가 계속 나와. 아직도 개털이 있네

쓰레기를 치우고 치우고

-일단 종양제에 다 담아. 캔이랑 소주병은 따로 내가 정리할게.

-한꺼번에 다 하려면 끝이 없어. 오늘은 이쯤 하고 필요한 거 사러 가자.


만나면 말하느라 바빴는데 오늘 우리는 말이 없었다. 청소하느라 지치기도 했지만, 여자에 대한 분노와 그동안 아빠를 방치한 것 같은 미안함이 밀려와 할 말을 잃었다.


-언니, 그거 꼭 사야 돼?

마트에서 집에 필요한 사는데 동생이 두 번째 물었다.

-응, 아까 보니까 아빠 화장지 쓰고 있더라. 아빠 비염 심한 거 알지? 이걸 꼭 놓고 싶어.

-그냥 언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난 이해가 안 되네.


집에서 출발하기 전 필요한 물품을 적을 때부터 고개를 갸웃거렸던 막내에게 웃으며 말했다

-난 이게 없으면 그냥 초라해. 이게 날 업그레이드 시켜주고, 기분 좋게 만들어.

-알았어. 언니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뭐.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빠의 침대옆 협탁에 갑 티슈를 반듯하게 놓았다. 볼품없던 방이 환해졌다.


작고 사소하고 하찮은 것이 살아갈 힘을 줄 때가 있다. 남들은 그거나 그거나 뭐가 다르냐고 하지만 꼭 그거여만 하는 것이 있다. 그게 있어야 힘이 나는 것. 없으면 정말 바닥인 것 같은 느낌. 내게는 좋은 느낌의 갑 티슈가 그렇다. 나는 지금 돈이 없지만, 언젠가 이렇게 고급스럽고 부드러운 티슈를 반장씩이 아니라 한 장씩 팍팍 뽑아 쓸 거야. 가난하다고 해서 아무 종이로 코를 풀고 싶진 않아. 나는 소중하니까.



그런 마음이었던 거 같다. 그 마음이 고되고 힘든 10년의 자취를 견디게 했다. 부모의 도움 없이 혼자 방을 구하고 방세를 물고, 이사하며 살았던 그때 허름한 방에서도 예쁘고 좋은 갑 티슈를 썼다. 그걸로 버텼다. 나는 언젠가 이 갑 티슈를 망설이지 않고 팡팡 쓰며 살 거야.


작고 사소하지고 나만 알고 있는 좋은 것들이 있다. 머리빗, 핸드크림, 만지면 기분 좋은 수첩과 부드러운 볼펜, 그리고 도톰하고 은은한 향기 나는 갑 티슈. 이것들이 힘들 때 나를 숨 쉬게 한다.


아빠도 그랬으면 좋겠다. 지금 닥친 일은 아빠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 아빠도 그걸 알고 있지만 받아들일 수 없어서 발버둥을 치고 있을 뿐이다. 궁지에 몰린 쥐처럼 독기만 잔뜩 남아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런 아빠에게 잠시나마 기분 좋은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삶은 끝난 것 같아도 끝이 아니다. 아빠의 남은 삶 속에 숨구멍하나 있기를 바란다. 원망과 자책을 버리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또 다른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아빠는 늦었다고 하지만 늦었다는 순간에 다시 시작하면 된다.


-그거 꼭 사야 돼?

묻던 동생이 방에 들어와 보더니

-괜찮네. 신혼방 같은데.

하며 웃었다.

-그렇지. 청소하니까 더 속상하다. 남한테 주기 정말 싫다.


그날 저녁 막내는 아빠의 전화를 받았다. 아빠가 고맙다고 했다고 한다. 사람 사는 집 같다며 언니들도 같이 왔었냐고 물었다고 한다. 둘째는 그것도 막내가 꾸며낸 말 아냐? 했고, 마지막으로 아빠에게 한 말이 죽으면 갈게요. 였던 나는 용기를 내서 아빠에게 전화했다. 아빠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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