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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아는 도깨비 하나쯤은 있다

백일 글쓰기 No.8

by 레마누


말 놔도 돼요?

네?


여자가 똥그랗게 눈을 뜨고 남자를 바라본다. 핸들을 잡고, 앞을 보고 있는 남자의 오른쪽 귀가 빨갛다.


아니. 그냥 말 놓으면 안 될까 해서

싫은데요

선물도 가져왔는데


첫 만남에서 쓰디쓴 커피를 마시고 난 후, 점심으로 뭐 먹을까? 를 고민하던 중에 여자가 해장국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전날 여자는 새벽까지 술을 마셨고, 빈 속에 커피가 들어가자 배가 요동치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가 말한 해장국집으로 차를 몰았다. 식당은 정기휴일이었다. 남자가 당황해서 우물쭈물하는 사이 여자가 말했다.


그럼 태광식당갈까요?


태광식당은 한치주물럭으로 유명한 식당이다.


한치 좋아해요?

네?

아니, 한치를 잘 먹어서.

아.


그러고 보니 여자는 한치만 골라먹고 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좀 그랬네요.

괜찮아요. 전 한치보다 돼지고기를 좋아해요.

네... 그런데 저 원래 한치 엄청 좋아해요. 없어서 못 먹죠.



여자는 남자의 툭툭 내뱉는 말이 재미있고 좋았지만, 관심 없는 척했다. 한치는 맛있었다. 여자는 돌아서며 남자의 연락이 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서른이 되기 전에 결혼을 하지 않으면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굴지만, 결혼할 사람은 정해져 있다는 말을 믿었다. 며칠 뒤 여자는 만나자는 남자의 전화를 받았다. 여자가 버스에서 내리자 저만치에 남자가 서 있었다.


선물이요?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남자가 고개를 돌리자 여자도 덩달아 고개가 돌아갔다. 뒷좌석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있었다.




선물이 어딨어요?

저게 선물인데요.



여자가 차에서 내려 검은 비닐봉지를 열었다. 비닐 안에는 반건조된 한치 스무 마리가 들어 있었다.


그때 한치 좋아한다고 하길래


여자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좋아한다고 했다는 말을 기억한 것도, 그렇다고 한치를 한 아름 사 온 것도. 선물이라면서 검은 비닐에 덜렁 담고 온 것도 여자를 웃게 만들었다.


여자는 어쩌면 이 남자가 좋아질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 말을 친구에게 했더니 기겁했다. 누가 두 번째 만났을 때 반건조한치를 선물이라고 가져오냐며 이상한 사람 아니냐고 물었다. 왜? 나는 너무 좋은데. 엄마랑 집에서 구워 먹는데 너무 맛있더라. 나는 싫을 것 같은데. 난 좋아.


포장지가 중요한가?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가 중요하지.


그런데 오빠 지금은 한치 왜 안 사줘?

그런 건 한 번만 하는 거야.




큰 딸이 배우 이동욱에 빠졌다. 영화 '하얼빈'을 보고 오더니 현빈이 아니라 이동욱이 멋있다고 했다. 나도 어렸을 때 주인공보다 그 옆의 사람을 좋아했는데, 그런 것도 닮았나 보다. 하도 '이동욱, 이동욱'노래를 불러서 같이 "도깨비"를 본다. 점심 먹을 때 한 편, 휴일에는 오전, 오후 해서 2편씩 본다. 어제는 종일 집에 있어서 세 편을 봤다.


근데 아빠는 공유보다는 이동욱 같아.

에.. 아닌데요.

얼굴이 아니라 하는 게.

전혀 인정 못하는 표정의 세 남매

정말이야. 아빠도 예전에는 그랬어

지금은 안 그렇잖아요

변하지 않는 사랑이 어디 있니? 도깨비도 그렇게 말하잖아.

그런가?


남편님은 우리가 그런 말을 하거나 말거나 소파에 누워 핸드폰게임을 하는 중간중간 드라마를 본다. 아들은 게임하는 아빠를 부러워하며 아빠에게 엉겨붙는다. 드라마가 끝나야 게임을 하는데, 넘 달달해서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는 아들은 언제 끝나냐고 자꾸 확인한다. 소파 밑에서 큰 딸과 나는 어깨를 기대고 어떡해. 어떡해. 하며 티브이를 본다. 소파에 앉아 있던 막둥이가 중요한 순간에 내려와 안긴다. 꼭 안아서 같이 본다.



가끔 남편이 미울 때가 있다. 무뚝뚝한 말투에 지적질 좋아하고, 칭찬하면 입에 가시가 돋는 줄 아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을 때도 있다. 그때마다 검은 비닐 안에 한치를 가득 담고 환하게 웃던 예전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래, 원래 그런 사람이었지. 입바른 소리 못하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 그게 좋다고 믿음직하다고 해 놓고 이제 와서 싫다고 하는 건 나의 변덕이다. 내 문제다.


오빠, 커피?

콜.


도깨비처럼 운명적인 사랑? 저승사자의 눈물? 그런 거 없다. 그래도 같이 늙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 좋았던 시절을 추억할 때 맞장구쳐주고, 아이들이 속 섞일 때마다 엄마가 너희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하며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다.라고 생각은 하지만, 인간적으로 소파 위에 너무 오래 누워 있다. 그분께서는.



비를 맞고 돌아온 저녁.

당신의 우산이 되어주는 건 무엇인가요?

부르는 대답하는 목소리,

같은 시간에 같은 걸 봤던 기억,

처음 속도를 맞춰 걷던 순간 같은 것들.


누군가가 생각나시나요?

그래요. 바로 그 사람이에요.

-드라마 <도깨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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