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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는가

백일 글쓰기 No.16

by 레마누

넥플릭스 드라마 <더 에이트 쇼>는 삶의 끝자락에 몰린 8명의 사람이 가상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게임에 참석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자신이 고른 카드의 숫자에 따라 1부터 8까지 다른 층수에 살게 된 이들에게는 한시간당 층수에 따라 다른 금액이 입금된다. 즉 한 시간에 1층은 1만 원이 입금될 때 8층은 34만 원을 번다. 이들에게 시간은 곧 돈이었고, 게임이 시작될 때 정해진 층수는 곧 계급이었다.



천우희와 박정민을 좋아해서 본 드라마였는데, 가장 기억이 남는 인물은 1층 상국이었다. 극 중에서 몸이 불편한 상국은 게임에 불리했다. 돈도 없고, 다른 이들에 비해 재능도 없었던 그는 강한 자의 억압과 횡포에 수긍하고, 자신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10억이 간절하게 필요했던 상국은 시간을 늘리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누구도 얻지 못한 많은 시간을 얻는다.



상국이 선택한 건 '외줄 타기'였다. 광대분장을 하고, 높은 곳에 설치된 외줄을 막대 하나를 들고 걸어갔다. 숨 죽여 본다. 줄이 출렁이더니 막대가 떨어지고 균형은 잃는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모든 것을 건 줄타기는 계속되고, 보는 사람도 줄 위의 사람도 긴장은 최고조에 이른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에 모든 것이 달렸다. 실수하면 끝이다.


심혈을 기울이다.


온갖 정성을 쏟고, 노력을 한 곳으로 모은다. 연습하고 또 연습한 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다.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실패하면 죽는다는 공포를 이겨내야 한다. 저 줄의 끝에 닿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돌아오길 기도하는 가족을 만날 수 있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걸어도 아깝지 않은 가족을 위해 발을 디딘다. 아래를 보면 안 된다. 앞을 보고 나가자. 한 발, 한 발. 천천히 신중하게


떨어지면 끝난다는 마음으로 공연을 한 그에게 1000시간이 주어졌다. 참가자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획득했다. 가진 것이 가장 적었기에 사람들의 멸시와 무시를 묵묵히 견디던 1층은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고, 죽음의 외줄 타기를 통해 참가자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획득했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는가?


글쓰기로 업을 삼고 싶다는 막연한 마음은 있지만, 막상 하는 걸 보면 취미란에 글쓰기를 적는 게 맞다. 24시간 중 글 쓰는 시간은 많이 쳐줘야 3시간 정도다. 독서 2시간을 더해도 글에 투자하는 시간은 20%남짓이다. 파트알바를 하면서 정직원의 삶과 월급을 탐내는 꼴이다.


쓰면서 눈물이 날 때가 있다. 속에 있는 창자까지 내보일 작정으로 막 써 내려갈 때가 있다. 꾸며낼 말을 생각하지 않고, 날 것 그대로의 글을 쓰고 나면 한숨이 먼저 나온다. 그런 글은 나를 먼저 울리고, 읽는 이에게 가 닿는다. 아프지만 아프지 않은 척하고, 슬프지만 괜찮은 척하는 글을 읽으면 위로해주고 싶어진다. 누군가의 글에서 나의 아픔과 고통을 느끼고,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있을 그를 위로해주고 싶어진다. 그런 글을 읽고 내가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받았듯 나도 사람을 움직이는 글을 쓰고 싶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돼요?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로 독서모임을 하던 중 누군가 말했다. 한강의 글을 읽으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쓰면서 힘들었을 것 같다고 하며 그런 글쓰기. 몸으로 끌고 가는 글쓰기를 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그래서 딱 아프지 않을 만큼만 쓴다. 더 생각하고 파고들면 몸도 마음도 너무 아플 것 같아서 적당할 때 끝을 낸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멈춘다. 적당히 괜찮은 글을 쓰고 적당히 만족하면서 치열하게 살다 간 사람들을 찾는다. 대리만족이다.


그러면서도 갈망한다.

간절히 바라고 구한다. 나를 가둔 단단한 틀을 깨고 나갈 수 있기를. 내가 만들고, 나를 스쳐간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의해 단단하게 다져진 틀이 있다. 오랜 시간 파도에 휩쓸려 반들반들하게 된 조약돌처럼 둥근 사람이 되고 싶지만, 파도가 치면 모든 걸 잃을까 두려워 성벽을 쌓고 들어앉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언젠가 바다로 나갈 거야. 노래만 부르고 있다.


이틀 동안 아프다는 것을 방패 삼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니 마음 한구석이 꿈틀거렸다. 내일 개학을 앞두고 오늘 30일 치 일기를 쓰는 아이처럼 조급했다. 왜인가 살펴봤더니 오늘 지담작가님과 코칭수업이 있었다. 작가님을 만나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데, 문득 나는 왜 항상 후회하고 반성만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님을 만나도 분명 비슷한 말을 할 것 같은데 그러면 작가님은 그 큰 눈을 반짝이며 괜찮다고 할지도 모른다. 난 하나도 안 괜찮다. 누군가 막 혼내주었으면 좋겠다. 똑바로 정신 차려서 살라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대충 살면서 많은 것을 바라는 건 욕심이고 아집이니 할 거면 하고 안 할 거면 때려치우라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입바른 소리를 들으면 웃음이 사라진다. 누군가의 지적질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듣기 좋은 말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당장의 달콤함에 번번이 넘어갔다. 언제나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발전이 없는 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고쳐야 할 것이 보인다. 지적질은 기분 나쁘지만 조언은 필요하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아이에게 그래 한번 가봐라 고생하면서 얻는 것이 있겠지. 할 수도 있지만, 되돌아올 힘이 없는 나는 직접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이건 이래서 안 됩니다. 이건 별로군요. 음. 이런 글은 일기장에나 쓰시죠. 같은.


이렇게 쓰다 보니 지담작가님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돼 버렸다. 작가님이 10시 이전에 이 글을 보실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보신다면 제가 얼마나 작가님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는지, 조언을 받들 준비가 되어 있는지 살펴주시길. ^^


어제 잠이 들려고 하는데 드라마 <더 에이트 쇼>에 나오는 외줄 타기 장면이 떠올랐다. 내일 아침에 글쓰기와 외줄 타기를 연결시켜서 이렇게 저렇게 글을 써야지 하며 머릿속에서 돌아다니는 글들을 조합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몸이 가뿐했다. 그동안 쓸거리가 없어서 꾀병이 났던 건 아닐까 살짝 의심이 들었다. 7시가 넘었다. 오늘도 발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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