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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몰라도 아는 척, 알아도 모르는 척

by 레마누


날 좋은 날 엄마는 이불홑청을 뜯었다. 이불집에서 태워온 목화솜을 잘 털어서 모양을 만들고 햇빛에 바짝 말린 이불 홑청을 빳빳하게 풀 먹여서 다림질을 한다. 이때 엄마와 마주 보며 이불홑청을 잡아당기는 건 큰딸인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린 동생 두 명은 이불 위에서 강아지처럼 뒹굴며 햇빛냄새를 맡았다. 엄마는 이불이 구겨진다고 했지만 딱히 혼을 내지는 않았다.




젊고 부지런했던 엄마는 각을 맞춰 솜을 집어넣고 이불홑청을 커다란 바늘로 꿰맸다. 그리고 위쪽에는 큰 수건을 갖다 대서 다시 한번 바느질을 했다. 그날 이불에서는 햇빛냄새와 엄마냄새가 합쳐져서 이불을 덮는 순간 잠이 쏟아졌다.




한 번만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딱 그 순간 방안 가득 이불을 펴 놓고 양쪽에서 잡아당기며 서로 힘세다고 낄낄대던 그때. 누우면 보송보송 잘 마른 이불냄새가 좋아서 자꾸 눕고 싶었던 그때.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우리 집이 제일 따뜻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이런 이불이었던 거 같다


결혼할 때 엄마는 모든 혼수를 제주시에서 장만했다. 침구도 제주시에서 제일 큰 곳을 찾아가서 제일 비싼 건 아니었지만 매장에서 제일 예쁜 이불을 골라줬다. 분홍색 혼수이불을 보면서 그제야 결혼을 실감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붙박이장 하나 있던 텅 빈 안방에서 요와 이불만 펴 놓고 남편과 잠을 자면서도 포근한 이불과 따뜻한 남편의 팔베개가 있어 행복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한동안 그 이불을 꺼내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이불은 가볍고 먼지가 덜 나는 걸로 쓰게 됐다.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이 문득 그 이불이 생각난다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그래? 그럼 솜 태우고 와서 깨끗이 빨고 쓰자. 그리고 이불을 싣고 솜집으로 갔다.



제주시에서 제일 큰 이불집에서 산 비싼 혼수이불은솜을 태울 수가 없었다. 목화솜인 줄 알았는데 인공솜이었다. 이불가게 주인은 종종 이런 일이 생긴다며 당황하는 나를 위로했지만 이미 빨개진 얼굴로 솜집을 나오는 나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이불을 들고.....




남편은 차에 타서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오랫동안 장롱 속에만 있어서 그랬는지 이불 밖에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오빠, 이거 버리고 가자. 어차피 가도 못 쓸 거잖아. 여기 버리고 가."




엄마가 있었으면 당장 전화를 했을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엄마에게 화를 내면 엄마는 또 이불집을 욕하고 그렇게 열을 내고 나면 기분이라도 풀렸을 텐데. 엄마도 없는데 전화할 곳도 없어졌다. 진이 빠졌다.


괜스레 남편에게 투덜거렸다. 목화솜이불인 줄 알았는데 인공솜이었다는 말을 시어머니한테는 할 수 없었다. 이미 우리가 이불을 들고 나오는 걸 알고 있었던 시어머니가 혹시 눈치를 챌 까봐 우리 부부는 조마조마하며 마당에 차를 세우고 후다닥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엄마도 몰랐을 거라고 생각한다. 혼수이불이었고, 비쌌다. 매장에서 제일 비싼 건 아니었지만 제일 이쁜 건 분명했던 그 이불속의 인공솜을 덮으며 우리는 역시 솜이불이 좋다며 포근하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인공솜이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이불에게 정이 뚝 떨어져 버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이불이었는데.



우리 집에는 이불이 많다. 식구가 많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유독 이불욕심이 많은 나는 이쁜 것, 좋은 것만 보이면 자꾸 사고 들어온다. 이불과 쿠션, 커튼을 좋아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일 먼저 하는 것도 이불을 빨고 커튼을 바꾸는 것이다. 작은 노력에 비해 변화의 크기가 크다.


내가 좋아하는 건 포근함이다. 따뜻함이다. 집이 따뜻한 게 좋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일단 집에 들어와서 이불 속에 들어가면 그냥 다 잊을 수 있는 그런 따뜻함. 엄마가 어린 시절 우리에게 주었던 그 따뜻함과 안정감. 작은 행복들을 기억한다. 이제는 내가 만들어가야 할 것들.



날이 추워지면 포근한 이불을 꺼낼 수 있어서 좋다. 시어머니가 새 거라며 이불을 주셨다.



아이들은 보드랍고 포근하다며 이불 위에서 뒹굴었다. 기분이 좋았다.


겨울은 역시 호피와 밍크다


사족 : 작년 겨울에 써 두었던 글을 꺼내 올립니다. 며칠 날이 덥더니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내리는 제주입니다. 전기장판을 켜고 앉아서 혼자 중얼거리다 글을 올립니다. 이불은 여름이불로 바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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