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배 생각
-안상학-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외박을 밥 먹듯 하던 젊은 날
어쩌다 집에 가면
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아배 발고랑 내 나는 밥상머리에 앉아
저녁을 먹는 중에도 아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니, 오늘 외박하냐?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
집을 자주 비우던 내가
어느 노을 좋은 저녁에 또 집을 나서자
퇴근길에 마주친 아배는
자전거를 한 발로 받쳐 선 채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아야, 어디 가노?
-예....바람 좀 쐬려고요.
-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불다?
그런 아배도 오래 전에 집을 나서 저기 가신 뒤로는 감감 무소식이다.
오래전 내가 살던 집은 집은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지어진 쓰레트집이었다. 집벽돌과 흙으로 벽을 쌓고, 지붕에 색색들이 쓰레트를 올려 지은 집이 새로 뽑은 신작로 옆으로 나란히 서 있었다. 성배네가 쓰레트집을 허물고, 옥상이 있는 양옥집을 지을 때도, 임실이네가 골목 안쪽에 땅을 사서 기름보일러가 있는 집을 지을 때도 우리 집은 60초 백열등으로 불을 밝히고 있었다.
연탄보일러가 되는 안방에서 아빠와 엄마, 나와 여동생 둘이 이불 두 개를 깔아서 잤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구들목과 벽장이 있는 방에서 주무셨고, 고등학생이던 삼촌은 이불 하나를 깔면 바닥이 꽉 차는 방에서 책들을 쌓아놓고 지냈다.
마루는 나무널빤지를 이어서 바닥을 깔았는데, 걸으면 삐그덕 거렸고, 언제부턴가 구멍이 생기더니 그 안에서 쥐들이 오며 가며 노는 것이 보였다. 어린 나에게 뚫린 나무바닥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것이 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가난하기는 제주시에 살 때도 마찬가지여서 넓고 환한 주인집을 돌아서 어두운 구석에 있는 한 칸짜리 방에 다섯 식구가 살았다. 그 집에서 막내 동생이 태어났다. 아빠는 셋째가 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집을 나갔고, 나는 누워 있는 엄마의 눈치를 보며 4살이었던 동생을 데리고 나갔다.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다. 엄마는 막냇동생이 울 때마다 같이 우는 것 같았다. 7살 때부터 곤로에 불을 켜고 밥을 해서 동생을 먹였는데, 그때 소원은 유치원에 가는 것이었다.
우리 동네에서 유치원에 안 가는 아이는 나뿐이었다. 3살 때 한글을 떼고 6살 때 구구단도 외웠다. 7살에는 나눗셈을 척척 해내서 동네 삼촌들에게 칭찬도 많이 받았는데, 나보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다 가는 유치원에 나만 못 갔다. 하루는 친구들이랑 같이 유치원에 가서 들어가지는 못하고 운동장에서 놀았다. 나뭇가지를 들고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이 나왔다. 같이 놀다가도 선생님이 부르는 소리에 후다닥 들어가는 친구들이 부러웠지만 한 번도 엄마에게 유치원에 보내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8살 때 제주시에서 제일 큰 국민학교에 입학한 나는 1학년 4반 36번이었다. 한 반에 60명 가까이 있었고,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했다. 담임선생님은 나를 이뻐했고, 임시반장을 시켰다. 어린 나이에 그건 대단한 일이었고,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부모님은 새벽에 나가 밤늦게 들어왔다. 새벽시장에서 생선이나 야채를 떼서 동네마다 돌며 팔았다. 어느 날 내가 심지가 거의 없는 곤로에 불을 붙이다 불이 옆으로 번졌고, 주인집에 사는 영자언니가 달려와 불을 껐다. 얼마 전에 나와 머리채를 잡고 싸웠던 수영이까지 우리 집에 와서 겁에 질린 나를 위로했다. 부모님은 8살짜리에게 4살과 1살 난 아이를 맡기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고, 제주시에 상경한 지 5년 만에 시골에 다시 내려갔다.
큰아들이 식구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오자 할아버지는 안방을 내줬다. 그렇게 좁은 집에서 8명이 살다 내가 중학교 갈 때쯤 할머니네는 마당을 가운데 두고 집을 지어서 나갔다. 방이 두 개 있는 작은 집이었는데, 틈만 나면 할머니방에 가서 누워있었다. 할아버지를 우리는 "하지"라고 불렀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불렀는데, 가슴이 나오고 여드름이 하나둘씩 생길 때까지 할아버지는 "하지"였다.
동네친구들은 23살부터 하나둘씩 결혼했다. 28살까지 결혼 안 한 사람은 나와 윤정이뿐이었다. 주말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촌에 내려갔는데,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할머니방에 가기 일쑤였다. 할머니방은 따뜻하고 잠이 잘 왔다.
하루는 말없는 우리 할아버지. 여든이 넘어도 허리가 꼿꼿하고 매일 수염을 깎고, 여름이면 하얀 모시옷만 입던 울할아버지가 내 얼굴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결혼은?
-안 해
-왜
-사람이 없어
-너 지금 몇 살이니?
-스물여덟
-너 스물다섯 때는 금메달, 스물여섯은 은메달, 스물일곱은 동메달. 스물여덟은 똥메달인 거다. 너는 아니라고 해도.
-할아버지 요즘 그런 말하면 큰일 나.
-아무나 만나서 결혼해라. 나 살았을 때. 팔하나 없어도 눈하나 없어도 좋으니 아무나 데려와봐. 내가 봐줄 테니.
울할아버지 마지막 소원은 큰손녀딸이 결혼하는 걸 보는 거였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식날 문상 온 할아버지의 사촌동생이 상복 입은 나를 보고 남편을 소개해줬다. 남편과 만나기로 한 전날 꿈을 꾸었다.
할아버지가 커다란 버스에 타고 있었는데 나는 반가워서 할아버지 부르며 따라갔다. 할아버지는 버스에 오르며 내게 다정하게 손을 흔들었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참 편안하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의 유머를 좋아한다. 해학과 유머가 있다. "아배 생각"을 읽다 보면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말들이 생각난다. 거칠지 않고 빙빙 돌려서 말하는데 가만히 듣고 있으면 참 재밌는 말들이다.
시골생활은 고되고 힘들었다. 수세식화장실이 있는 집에 사는 게 소원이었던 나는 크면 절대 시골에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뜨거운 물이 팡팡 나오고, 겨울에도 반팔을 입고 사는 도시사람이 돼야지. 비 오고 나면 무섭게 자라난 풀들을 뽑느라 풀독 오른 팔을 피나게 긁으며, 이놈의 촌구석 지긋지긋하다고 투덜거렸다. 주말마다 비가 오길 기도했지만 하느님은 내 소원을 들어준 적이 별로 없었다.
아무리 시험기간이라고 해도 엄마는 새벽부터 깨웠고, 나는 울먹이며 밭에 끌려갔다. 허름하고 작고 어두운 집이었는데, 이상하게 따뜻했던 그 집이 자꾸 꿈에 나온다. 풍족했던 것보다 항상 부족했었는데, 좋은 날보다 울었던 날들이 더 많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꿈 속에서 나오는 시골집은 따뜻하고, 그 안에서 나는 한없이 웃고만 있다. 어딘가에서 기억이 일그러진건지 아니면 그때 내가 모르던 행복이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너무 많은 것을 가졌다. 편리하고 편하게 살고 있다. 그런데 뭘 먹어도 그때 먹은 맛이 안 나고, 찜질방에 몸을 데워도 그때 아랫목의 뜨끈함을 따라오지 못한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 시절 특유의 정서가 종종 생각난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들, 돌아보면 사무치게 그리운 것들이로 가득했던 오래 전 그 날이 떠오르는 "아배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