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통이었다.
뚜껑 닫힌 통
꽉 채워 넣은 통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고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는
견고하고 무거운 통이었다
나는 통이다.
비어 있는 통
뚜껑이 날아간 통
억지로 밀어 넣다 어느 날, 터져버렸다.
꽁꽁 싸매고 보물이라 아끼던 것들이
안에서 썩어 문드러져 떨어졌다.
쏟아진 것들을 주워 담다 문득
더러워진 손이 보였다.
이게 뭐지?
왜 이것들이 내 손을 더럽히고 있지?
잡았던 것을 놓고, 손을 씻었다.
가진 게 없는 자가 되었다.
나는 통도 뭣도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나에게 들어왔다
나를 거쳐 나가는 걸 본다.
그것들은 한때 통이었던 내 안에서 춤추다
울고 웃는다. 그리고 기척 없이 나간다.
통도 뭣도 아닌 나는 쉼 없이 오가는 그것들에게 길을 내어준다.
내가 통이었나?
내 손을 떠난 것들에게 안녕이라 말하며 돌아서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통이 뭐야?
통은 막힘이 없는 것이다.
문제를 풀다 막히면 머리에 쥐가 난다.
답답하고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한다.
머리를 쥐어박는다.
가슴을 치고, 얼굴을 붉힌다.
막힌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나를 막아선 것이 크면 클수록 고통은 커진다. 통한다는 것은 막힘이 없는 것이다. 막힌다는 것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선은 절로 그렇게 되는 것인데, 일부러 억지를 써야 된다면 그것은 선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통은 선이고, 불통은 악이다.
통하려면 비어있어야 한다.
비어있어야 들고나감이 자유롭다.
꽉 차 있으면, 깨뜨리기 힘들고, 들기에 무겁다.
채워 넣기만 하고, 비워내지 않으면 언젠가는 터진다.
안에서 썩어 문드러진다.
그것도 모르고 무겁다고 하면서도 많이 담아서 좋다고 히히덕거리는 꼴이라니.
그러다 어느 날, 터지면 당황한다.
이렇게 될 줄 몰랐어. 하며 징징댄다.
알고도 그랬다면 자만이고, 모르고 당했다면 무지다.
자만은 겸손보다 악하고, 무지는 과시보다 무섭다.
따라서 자만도 무지도 선이 아니다.
자연은 자연스러운 것인데, 흘러야 할 것이 흐르지 않고, 나가야 할 것이 나가지 않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자연스럽지 않은 것을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억지를 쓰다 보면 힘이 들어가고, 힘들면 오래가지 못한다.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며 입을 삐쭉거리고 돌아선다. 통을 버리고 통을 잊으면, 그 안을 자유롭게 오가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문을 열고 반갑고 맞아들여야 한다. 빼꼼히 얼굴만 내밀고, 볼 일이 끝났으면 가세요. 하면 오려던 것도 발을 돌린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에게 온다.
나에게 와서 잠시 머물다 나를 거쳐 세상에 나간다.
내 안이 비어 있을수록 더 많이 들어온다.
비우고 또 비워야 채워진다. 화수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