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지 말고 그냥 해
7월 13일 지담작가님의 유튜브라이브 스트리밍을 보면서 들은 내용과 제 생각을 담은 글입니다. 매주 일요일 오전 7시는 지담작가님이 참가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인문학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동참만으로도 사고의 확장이 이뤄지는 신기한 시간입니다.
새벽에 잠이 깬 상태로 가만히 누워 생각했다. 어제 쓰지 않은 글을 떠올렸다.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고 잠이 들어버린 나를 생각했다. 예전의 나라면 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잠을 설치거나 험한 꿈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나는 자려고 누우면 바로 잠이 들고, 새벽 4시에 눈을 뜬다. 정신이 깨어난다.
1월에 <엄마의 유산>을 만났다. 글을 쓰고 책을 읽는 건 변함이 없는데, 쓰는 글이 달라지고, 읽는 책이 바뀌었다. 기존의 것들과 새로 들어온 것들이 싸웠다. 충돌하면 스파크가 튀고 열이 난다. 그때쯤 몸도 마음도 많이 아팠다.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싸운다는 것은 사활을 건다는 것이다. 너도 좋고, 나도 좋은 건 없다.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가 사라진다. 둘 다 가지려 하면 손만 무겁고 오래가지 못한다.
기존의 생각을 내려놓고,
새로운 생각을 조건 없이 수용하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해야 할 것을 하다 보니
하고 싶은 것을 절로 하게 되었다.
뭐든 처음 배울 때는 설명을 듣는다. 설명 다음에 실기다. 수영을 배울 때도 수영강사가 시범을 보인다. 헬스코치가 먼저 기계에 대해 설명하고, 운동효과에 대해 말해주고 난 후, 해 보라고 한다. 배우는 것이 먼저도 하는 것이 다음이다.
이때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게 아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하면 될 것 같다. 알 것 같다. 그래서 배우는 것을 멈추고 한다. 처음에는 잘 되는 것도 같다. 하지만 얼마 못 간다.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점점 재미가 없어진다. 슬그머니 난 이런 거 안 해도 돼. 하면서 꼬리를 감추고 사라진다.
기본기를 닦는다는 것은 지루하고 힘든 일이다. 뭔가 성과가 보여야 신나게 하는데 지지부진한 것 같다. 들을 때는 알 것 같은데, 막상 해보면 못 한다. 자꾸 다른 방법을 찾는다. 빨리 쉽게 가는 길이 없나 두리번거린다.
나만 모르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
뒤처질 것 같아 성급하게 발을 떼는 조바심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기웃거리며 느끼는 패배감
한다 해 놓고 하지 못한 나에게 실망하는 마음을 안고 그렇게 하루를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잠을 잘 자는 이유를 찾았다. 나는 생각보다 잘하고 있었고, 내가 가는 길이 맞는 길이었으며, 눈에 보이지 않지만 단단한 기본기를 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고 있는 나와
하는 나를 바라보는 나
그리고 하는 내가 만들어갈 모든 것을 지켜보는 나
여기서부터는 유튜브강의에서 나온 것을 그대로 적었습니다.
질문 : 내적 자아는 들여다보는 훈련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내적자아가 있다면 외적 자아가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현실적 자아와 초월적 자아가 있다. 아이의 순수함에는 현실과 초월이 공존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한쪽만 있으면 순수하지 않다.
정신없고 혼란스러울 때 내적 자아가 보인다. 투명한 것은 밖이 잘 보일 때 느껴진다. 순수한 내적 자아는 밖이 혼탁하고 어지러울 때(외적 자아) 보인다. 외적으로 흥분될 때 흔들릴 때 비로소 투명한 것이 보인다.
유리창을 통해 보는 나무를 생각해 보자. 나무가 바람이 불어 흔들려야 비로소 유리창 너머의 나무가 보인다. 외적 자아가 가만히 있으면, 내적 자아도 가만히 있는다. 밖이 흔들리지 않으면 정체된 것이다. 흔들릴 때 내적 자아가 일을 한다. 따라서 정신없고 혼란스러울 때 내적 자아가 보인다.
외적 자아의 흔들림을 지켜보는 내적 자아가 있다면,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이 있는데 그것이 심연의 자아다. 심연의 자아는 멀리 떨어져서 보는 자아다. 이를 지담작가님은 FROM의 시선이라고 명명했다. FROM의 시선은 ~~로부터 보는 또 다른 시선이다. 미래로부터 보는, 깊은 어딘가에서부터 보는, 과거로부터 보는, 타인으로부터 보는 FROM의 시선으로 나를 본다.
위로 가든 멀리 떨어지든 멀리서 봐야 한다. FROM의 시선이 필요하다.
시력이 시선이 되려면 관조의 시선이 되어야 한다.
관조의 시선을 가졌을 때 초연이 된다.
~하고 싶다 (내적 자아) -> 외적 자아(인식)가 막는다 -> FROM의 시선으로 그냥 해
내적 자아가 내는 소리를 머리의 인식이 막는다.
막힌다
막아서는 인식을 걷어내고 그냥 한다.
머리의 인식이 걷어지면 인식이 사라지고 내적 자아의 소리가 들린다.
인식이 걷어졌을 때 내적 자아의 소리가 들린다.
외적 자아(현실적 자아)와 내적 자아(의식, 욕망, 본능)가 혼합되어 있어서 어지러운 것이다. 그럴 때는 내적 자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막아서는 외적 자아를(인식을) STOP 하고 그냥 한다.
FROM의 시선, 생각을 STOP 하고 그냥 하기는 지담작가님이 늘 강조하는 말씀이었다.
강의 때마다 들으면서도 솔직히 실생활에 적용시켜 본 적이 없었다. 작가님은 매일 해보라는데, 안 했다. 아니 못 했다. 설명을 들을 때는 알겠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아는 것을 행한다는 것이 어려웠다.
이틀 전의 일이다.
밥 잘 먹고 잠 잘 자던 막둥이가, 그래서 내가 발로 키웠다고 말하는 셋째가 갑자기 밥을 거부했다. 이틀째 밥을 안 먹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학교급식을 제일 빨리, 많이 먹었었는데, 학교에서도 밥을 남겼다는 말에 비상등이 켜졌다.
육아에 아무 도움을 주지 않으면서 잔소리폭격하는 것이 특기인 남편이 이때다 싶어 나를 공격했다. 다른 데 신경 쓰느라 아이들을 똑바로 키우지 못하고 있다고 미운 말을 날렸다. 요즘 글을 쓴다고 집안일에 소홀히 하는 내가 못마땅했던지라 막둥이를 꼬투리 잡아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을 쏟아냈다. 거기다 시댁문제까지 얽혀서 남편과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등교하는 막둥이에게 뭘 먹고 싶냐고 물었더니 파김치에 흰밥이면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마트에 가서 일주일치 먹을거리를 살 때 쪽파를 담고 왔다. 지난주에 배추김치를 하다 남은 양념에 멸치액젓으로 절인 쪽파로 후다닥 파김치를 만들었다.
냉장고를 정리하고, 부엌을 치우니 11시였다. 12시에 독서모임이 있다. 그런데 운동인증도 해야 한다. 아침부터 호들갑을 떨어서 이미 땀은 나 있는 상태였다. 운동하고 독서모임이 끝나서 씻으면 된다. 그래서 했다. 생각나자마자 40분 운동하고, 독서모임에 들어갔다.
예전의 나라면 어땠을까?
막둥이가 밥을 안 먹는 순간부터 온갖 고민이 찾아와서 낑낑댔을 것이다. 남편의 가시 돋친 말에 의미를 부여하고,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하며 내 감정에 휩쓸여 울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화를 냈을지도. 술을 마시며 신세한탄을 하고, 분하고 억울해서 잠을 못 잤을 것이다. 술기운에 잠이 들었다 해도 사나운 꿈에 시달려 깨고 나서도 몸이 무거웠을 것이다. 밥 안 먹는 막둥이에게 소리를 질렀을 수도 있다.
생각을 멈췄다.
그리고 그냥 했다.
파김치가 있으면 밥을 먹겠다고 해서, 파김치를 했다. 운동인증을 해야 하니까 운동을 했다. 독서모임 시간에 맞추려고, 세수만 하고 줌을 켰다. 화가 난 나를, 부지런히 정리하는 나를, 청소하는 나를 운동하는 나를 보며 이걸 다 해내는구나 싶어 뿌듯했다.
화가 나고 짜증 내는 나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는 나
채에 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나
할 일을 하는 나
그걸 뿌듯하게 지켜보는 나
이 모든 과정이 꼭 필요함을 알고 있는 나
여섯 개의 나로 움직인 시간이었다. 이렇게 하는 거구나. 이제야 알았다. 생각이 들어왔을 때 생각을 멈추고 그냥 한다는 것이 어떤 건지, 하고 나니까 알게 됐다. 이제 알았으니, 계속하면 된다. 매일 한다. 생각이 들어오면 일단 멈추고 그냥 한다. 지금은 글을 쓸 시간이니까 글을 쓴다. 7시가 되면 멈추고 부엌에 가서 아침밥을 차린다. 그냥 한다. 하다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