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금치는 죄가 없다

어쩔 수 없는 게 있기는 있다는 걸 인정하며 살기

by 레마누


얼마 전 일이다. 아들과 함께 행사장에 갔다 학부모를 만났다. 큰 딸과 아들이랑 같은 학년이라 7년째 친하게 지내는 집이었다. 그 집의 남편과는 4년 전 물놀이할 때 한번 본 적이 있었다. 야외행사라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 처음에는 눈인사만 했는데 아무리 봐도 예전에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뭐가 달라졌나. 한참을 생각하다 보니 예전에는 살이 많이 찌셨네. 했다면 지금은 날씬한 중년 남자의 모습이었다.



서윤이아빠 살 많이 빠졌다.


언니, 운동 열심히 했잖아. 식이요법이랑


완전 다른 사람 됐는데. 말할까 말까 했어.


얘기해 줘. 좋아할걸.



서윤이아빠에게 살이 많이 빠졌다고 했더니 화색이 돌면서 얘기를 시작했다. 말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웬걸 묻는 것보다 더 상세하게 살 뺀 얘기를 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말을 건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모임 하는 동생은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원래 예민하고 착한 동생은 잘하려는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이 들어서 그런지 갑작스럽게 살이 찌기 시작하더니 일 년 만에 20킬로가 넘게 살이 쪘다.



신경과약을 먹고 있다는 말에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있다. 오랜만에 만난 동생은 그전의 붓고 우울했던 얼굴은 사라지고 얼굴이 환해졌다. 많이 예뻐졌다고 칭찬하며 살도 정말 많이 뺐구나. 했더니 헬스와 식이요법으로 조절 중이라는 말을 했다. 잘했다고 하며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언니, 그런데 웃긴 게 뭔지 아세요?


우리 시누이들은 나한테 살 빠졌다고 말 안 해요. 아니,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20킬로나 빠졌는데. 시어머니 만나러 와서는 나한테는 말도 안 하고 가버려요.


정말? 아무도?


네, 애쓰게 뺐는데 누가 알아봐 주면 저도 좋거든요. 그런데 동네 아줌마들도 살 많이 빠졌다고 하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오는 시누이들은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예요. 정말 이번에 정이 뚝 떨어졌어요. 윽~~ 시금치 너무 싫어.



마흔 살에 셋째를 낳고 몸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급성방광염과 신종플루를 동시에 겪고 나니 양 입술에 물집에 가득 잡혔다. 피가 났다가 고름이 났다. 입을 크게 벌릴 수도 없어서 물이나 포카리만 마시고 있었다. 젖이 나오지 않아 셋째는 분유를 먹였다. 겨울이었고 제사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어머니와 시누이, 큰 형님과 함께 음식을 만들고 있었는데 아무도 내 몰골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어디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똑같이 일을 했다. 그러다 마트에 뭘 사러 가는데 친정 쪽 숙모를 만났다



배짱아


숙모.


잘 지냈어?



그런데 너 얼굴이 왜 그래? 아고.. 잘도 아파났구나게. 지금은 어떤 괜찮고?



그날 난 가깝지도 않았고 별 느낌도 없었던 친정숙모 앞에서 엉엉 울고 말았다. 숙모는 아무 말 없이 등을 토닥여주었다. 마흔이 넘은 세 아이의 엄마였지만 여전히 막내며느리이자 아파도 슬퍼도 안 되는 나는 눈물을 닦고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집도 있다는 거다. 이상하게 시댁이라는 글자는 이해가 안 되고, 불평등하고, 뭔가 서러운 것이 존재한다. 괜히 애꿎은 시금치만 안 먹는다고 하는 며느리틈에 나도 언제부터인가 껴 있다.





시금치는 3대 영양소뿐 아니라 수분, 비타민, 무기질 등을 다량 함유한 완전 영양 식품이다. 시금치의 엽산은 뇌 기능을 개선하여 치매 위험을 감소해 주며 세포와 DNA 분열에 관여해 기형아 출생 위험을 낮춰주는 등 노인과 가임기 여성 및 임산부에게 효과적인 식품이다. 괜히 뽀빠이가 시금치를 먹고 힘이 나는 게 아니다.



시금치는 죄가 없다. 사람도 죄가 없다. 문제는 위치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태도와 관심이다. 어른이든 아이든 관심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 나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칭찬을 해 주면 기분이 좋아진다.



내 얘기에 귀 기울여주고 기억해 주고 공감해 주는 사람을 싫어할 이유가 있을까?



시댁이라고 해서 다 무관심하고 친정식구라서 전부 다정한 것도 아니다. 결국은 사람의 문제다. 어떤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공감하고 관심을 가져 주는 여유가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아무리 좋은 곳에 가도 좋은 걸 모르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못 마땅한 것 하나를 꼭 찾아내는 재주를 부린다. 만족하지 못하고 어디서나 트집거리를 잡아내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일까.



남편은 내가 선택했지만 그래서 감수하며 살겠다고 생각하지만 가끔 시댁까지 다 끌어안기에 내 그릇이 부족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시금치를 삶는다. 몸에 좋은 시금치를 먹으며 내 몸에 영양분을 준다. 그렇게 천천히 씹어 먹으며 나쁜 것 열 가지와 좋은 거 하나의 무게가 같아지기를 바란다. 이왕이면 물이 반밖에 없잖아 하는 것보다 물이 반이나 남았네 정신으로 버티고 살아간다.



무엇보다 결혼해서 생기는 여러 가지 일들이 좋은 글감이 된다는 건 감사할 일이다. 만일 내가 아무 문제없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는데 시댁은 화목하고 시부모님은 친절하고 다정하며, 아들 딸은 순풍순풍 생기고, 아이들은 길 한번 어긋나지 않고 자라며 몸은 너무 건강하고 돈 걱정도 하나 없고 산다면 나는 아마 글을 한 줄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내게 시련과 글감을 동시에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린다. 오늘 점심은 시금치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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