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는 소망한다

가질 수 없는 것

by 레마누

7월 3일 헬스를 시작하면서 인스타그램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주계정은 북스타그램으로 운영하고 부계정은 일상이었는데 일상 대신 운동하고 인증하는 것으로 삼고 있다.


도서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기록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늘 뭘 얼마나 했는지 기록해 두면 내일 할 일을 예상할 수 있다. 어제보다 딱 하나만 더 하자. 하는 마음으로 운동을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는 그게 가능하다. 언젠가는 오늘만큼만 하자가 되겠지만 그날이 올 때까지는 거북이처럼 느리게 하지만 꾸준히 할 생각이다.


오늘 처음으로 인스타에서만 보던 레깅스언니를 헬스장에서 봤다. PT를 받는 오전 10시는 아저씨와 아줌마들이 많다. 헬스장에서 주는 옷을 입고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이게 맞나? 저거 해 볼까? 에라 모르겠다 뭐라도 하자 하는 마음으로 그래도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 덕분에 편안하게 운동을 했다.



오늘은 오전에 시간이 없어서 점심시간에 운동을 하러 갔는데 멀리서도 보이는 연분홍 배꼽카디건에 핫핑크 레깅스를 입은 언니가 등운동을 하고 있었다(물론 나보다 한참 나이가 어리겠지만 멋있으면 다 언니다)


비루한 몸뚱이로 옆에 앉아 허벅지운동을 했다. 제일 자신 있게 하는 운동이다. 3일 연속 하체운동만 해서 그런가 스쾃를 하는데 왼쪽 무릎이 찌릿했다.


아줌마는 자기 몸 아픈 건 눈 뜨고 못 본다. 얼른 운동하던 것을 멈춘다. 이건 몸이 쉬라는 신호야. 내가 하기 싫은 게 아니라고.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는데 레깅스언니는 지치지도 않는지 데드 리프트를 하고 있었다.


서방님도 그 옆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가만 보니 평소보다 무게가 더 많은 것 같기도 하다. 같은 거울을 보면서 운동을 하네. 음.. 서방님 완전 열심인데.


러닝머신 위에 올랐다. 요즘 걷고 뛰는 재미에 러닝머신은 아무리 힘들어도 꼭 하고 있다. 그런 내 자신에게 뿌듯해하며 속도를 올릴까 하던 차에 핫핑크 레깅스 언니가 천국의 계단으로 가는 게 아닌가.


뭐지? 종아리는 내 팔뚝만 하고 팔뚝은 내 손가락만 한 언니가 5분만 걸어도 살려주세요를 외치게 만드는 천국의 계단을 왜 저렇게 부드럽게 우아하게 걷는 거냐고

러닝머신 위에서 누가 보면 최고 속도로 뛰는 것처럼 온갖 소리를 다 내며 걷다 뛰길 30분. 곡소리 나오기 직전 가까스로 STOP버튼을 누르고 부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추스르며 내려오는데 천국의 계단을 계속 걷고 있는 레깅스 언니. 심지어 내가 샤워하고 나올 때까지 걷고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고 유튜브에서만 보던 천국의 계단 한 시간 걷는다는 그 언니들의 모습이구나 싶었다. 요즘 유튜브를 켜면 헬스 하는 영상만 나온다. 한번 검색한 걸 기억하는 알고리즘이 입맛에 딱 맞는 영상만 보여준다.

다이어트 성공기, 헬린이 탈출기, 애 셋 맘의 운동법 등등 제목을 보고 도저히 안 들어갈 수 없게 만드는 영상들 속 레깅스 언니들. 그런 사람은 영상에만 있는 줄 알았다

예뻤다. 사실 정말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운동하다 말고 자꾸 자신의 몸을 위아래로 쳐다보는 것도 이해가 됐다. 나라도 자꾸 보고 싶을 것 같다. 그리도 예쁜데. 그리고 레깅스도 이해됐다.


운동을 하면서 우리 몸에 근육이 얼마나 많은지 배우고 있다. 코치님은 똑같은 기구라도 어떤 동작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면서 운동을 할 때 자극되는 부분을 예민하게 느껴보라고 했다. 그런데 펑퍼짐한 검은색 티셔츠와 검정반바지를 입으면 근육이 안 보인다. 물론 지방으로 가려서 안 보이는 것이지만 가끔은 나도 팔과 다리의 아우성을 눈으로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아직은 아니다. 모든 것은 레벨이 있고 그에 합당한 절차라는 게 있다. 헬린이면서 고급반을 따라 하면 안 된다. 단지 동경만 할 뿐이다.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은 강력한 동기부여가 된다. 얼마나 운동하면 저런 몸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다 다시 태어나는 게 빠르지 않을까 싶은 현타가 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꿔본다


언젠가는 레깅스를 입고 남들보다 무게를 더 늘려서 힘들지만 전혀 힘들지 않은 척 당기고 들고 밀고 올리고 싶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당당해지고 싶다.


어렸을 때는 마법사의 지팡이가 부러웠다. 더러운 집도 뾰로롱 하면 깨끗해지고 살찐 사람도 순식간에 날씬해지는 마법의 지팡이를 갖고 싶었다. 그렇게 얻은 것을 유지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은 과정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직접 해야 한다.


그래야 어떤 일이 닥쳐도 해결할 수 있다. 땀 흘리며 익힌 것들은 몸에 각인되고 내가 강해지는 힘의 원천이 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유튜브에 나오는 멋진 헬스짱 언니들도 오늘 본 핫핑크 레깅스언니도 내가 모르는 노력을 쏟아붓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이 공평한 것 같지만 또 어떤 날은 타고난 몸매란 게 있어서 운동전혀 안 하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면서도 날씬한 사람을 보면 살짝 짜증이 난다. 이래저래 재미있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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