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아침상

스팸이 뭐라고

by 레마누


아주 오래전 일이다.


작고 오래된 슬래트집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삼촌과 엄마 아빠, 그리고 우리 세 자매가 살았던 그때. 아빠는 술을 많이 마셨다. 매일 저녁 술을 마시거나 혹은 밖에 나가서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 잠귀가 빨랐던 나는 깊은 잠을 자는 듯하다가도 아빠의 발소리, 화르륵 열리는 유리문소리, 파닥거리며 들어와 푸더덕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는 몇 시에 들어오든 밥을 먹었다. 엄마는 자다 깨거나 혹은 기다리다 눈이 벌게진 상태로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며 상을 차렸다. 대단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밥은 벽장 안에 두꺼운 수건으로 돌돌 싸맨 스탠통에 들어 있었다. 곤로를 켜서 된장국을 데우고 잘 익은 김치를 썰고 계란프라이를 반숙으로 해서 둥그런 스탱밥상에 들고 왔다. 아빠는 밥 한 공기를 뚝딱 먹고 나서는 금세 드르렁드르렁 거리며 잠이 들곤 했다.




가끔 80원짜리 라면을 끓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부엌에 붙어 있는 우리 방까지 라면 냄새가 흘러왔다. 돌도 씹어먹을 수 있었던 나는 자연스럽게 일어난 척 엄마에게 나도.라고 말하면 엄마는 한번 흘낏 보고 나서 물을 더 부었다. 노란 냄비째 담긴 라면을 술 냄새 진동하는 아빠와 머리를 맞대고 먹었다. 김치가 잘 익어서 맛있었다. 그렇게 라면을 먹고 잠이 들면 배가 든든했고 기분이 좋았다.



아빠는 자다가 가끔 물이라고 소리쳤다. 그러면 누군가 벌떡 일어나 아빠에게 물을 갖다 줬다. 아빠는 두 번 말한 적이 없었다. 아빠의 말은 법보다 강했다. 안방과 건넷방 사이에는 나무마루가 있었다.



하루는 술에 취한 아빠가 잠을 자다 물을 외쳤다. 잠자던 둘째가 일어나 녜하며 대답했다. 나는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둘 다 말을 해 놓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뭐지? 하며 안방에 가 봤더니 아빠는 물을 외친 적 없다는 듯이 편하게 자고 있었고 동생 역시 언제 대답했느냐는 듯이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잠꼬대로 물을 외친 아빠와 잠결에도 한 번에 대답했던 동생이었다.



시댁은 정반대인 집이다. 아버지의 권한은 축소될 대로 축소되고 대신 아들 셋을 중심으로 집이 돌아가고 있었다. 목소리가 크고 힘이 센 시어머니는 말없는 시아버지와 공부한다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아들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맛있는 것도 좋은 것도 아들들 위주였다. 나는 어떻게 시어머니가 시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큰 목소리로 말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늘 같은 남편에게 어떻게 그래?



언젠가 우리 집에 놀러 온 막내 남동생이 시어머니는 소리를 지르고 시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다고 뒤돌아서 궁시럭거리는 것을 보고 "누나와 형부의 20년 후 모습 같아"라고 했다. 절대 아니라고 했지만 보고 배운 게 그래서인지 말없고 착하기만 한 순둥이남편 때문에 속이 터져서 그러는지 나 역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남편을 먼저 챙겨주면 남편은 자기 신경 쓰지 말고 아이들이나 잘 챙기라고 말한다. 나는 아이들은 어련히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 우리 둘만 행복하면 된다고 하는데도 남편은 자꾸 아니라고 한다. 남편은 아이들 위주 나는 남편 위주로 생각해서 하는 행동들이 자꾸 부딪쳤다. 그래서 내가 바뀌기로 했다. 뭐든 아이들 위주로. 그렇게 살다 보니 편하긴 한데 어느 순간 남편이 살짝 섭섭해하는 것도 같았다.



오빠, 사과 먹을래요? 간단하게 밥 차려줄까?



평소 같으면 그릭요그루트나 사과하나 먹었을 텐데 갑자기 밥을 먹겠다고 한다. 살짝 짜증? 이 나려다 마음을 고쳐 먹었다. 어제 끓인 미역국을 데우고, 반숙한 계란프라이 두 개와 스팸을 과감하게 한 통 다 구웠다. 아이들이 있으면 상 위에 올라와도 하나 먹을까 말까 했는데 오늘은 후하게 인심을 쓰기로 했다.





간단하게 차린 남편의 아침상

친정아빠는 술 마시고 와서 돈도 없으면서도 큰 소리 빵빵 치며 밥상 차려와. 소리를 질렀는데 우리 서방님은 아침밥 먹고 싶다는 말도 크게 못 하고 살짝 말하는 게 안쓰러웠다. 이게 뭐라고 힘든 일도 아닌데 이게 뭐라고.



스팸만 해도 그렇다. 혼자 다섯 식구 먹여 살리느라 고군분투하면서도 아꼬운 아이들 입에 들어가는 거 보느라 언제나 자신은 뒷전인 사람이다. 일부러 두툼하고 크게 스팸을 구웠다. 마음껏 먹으라고.




간단하게 차린 남편의 아침상

무섭고 강하게 대하면 속으로 욕하면서도 일단은 대접을 하게 된다. 좋은 사람 별 불만 없는 사람에게는 자꾸 함부로 하게 된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가깝고 소중하고 착한 사람에게 더 잘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배려해서 하는 행동인데 그걸 모르고 혹은 외면하고 이용할 때가 있다. 오랜만에 남편의 아침밥을 차리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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