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미를 만났다
경미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순간 작은 몸집에 큰 목소리로 웃곤 했던 경미엄마가 떠올랐다. 엄마는 바쁘면 오지 말라고 했지만 내려갈 버스 시간을 알아봤다.
경미는 우리 집 맞은편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생이었다. 25명이 6년 내내 같이 붙어다녔음에도 경미를 친구라고 부르지 못하고 동창생으로 구분 짓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경미는 우리 반에서 혼자 검고 굵은 선을 긋고 사는 아이였다.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고무줄을 하거나 오징어게임을 하고 막을락을 하는 동안 경미는 교실에서 책을 보고 글을 썼다. 처음에는 같이 하자고 권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경미는 언제나 너희들과 나는 달라. 하는 표정으로 답했고, 몇 번 물어보다 지친 아이들은 나중에는 경미가 있던 없던 놀았다.
시골에서는 할 일도 재미있는 일도 넘치고 넘쳤다. 산과 들을 타고 넘으며 아이들은 작은 일에도 꺄르륵 소리를 질렀다. 흙바닥에서 공깃돌 놀이를 하며 해가 지는 줄 몰랐다가 엄마한테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간 적도 있었다. 머리는 빠질 듯이 아팠고, 가끔 플라스틱 옷걸이로 엄마가 때릴 때는 살을 에는 것 같았지만 다음 날도 또 다음날도 놀았다.
매일 소리를 지르고 매일 울고 웃었다. 하늘이 파래서 웃었고 비가 오면 눈물이 났다. 그렇게 사는 동안 우리 옆에 경미는 없었다. 수업시간에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걸 안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동창회를 할 때 경미를 부르지 않았다. 경미는 어떤살맨? 누군가 물어본 적이 있지만 아무도 경미가 어떻게 사는지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경미는 그런 아이였다.
경미는 우리 집 맞은편에 살았다. 경미네 아빠와 우리 아빠는 동창이었다. 아빠 말로는 어렸을 때부터 1.2등을 다투는 사이라고 했다. 아빠는 가끔 경미의 성적을 묻곤 했다. 나는 경미가 공부를 잘하는 걸 알고 있었다.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 빛날 때가 있다. 아주 짧은 순간. 모든 것을 쉽게 깨우치고 일이 술술 풀릴 때.
나는 초등학교 6학년때가 그랬다. 뭘 하든 상을 받았다. 글을 쓰면 제주도 일등을 했고 웅변대회를 나가도 항상 일등이었다. 공부를 하지 않고 시험을 봐도 언제나 백점이었다. 살아갈 맛이 났다. 딱 한번 그때 나는 빛이 났다. 반딧불이처럼 짧게나마 스스로 빛나던 시기였다.
나는 지독한 악필이었다. 글짓기대회를 가면 생각하는 것이 글보다 빨리 나왔다. 글을 빨리 쓰다 보니 글씨를 신경 못 썼다. 그래서 언제나 글씨는 엉망이었다. 당연하게도 외부대회에서 수상을 못했다. 읽을 수 없는 글을 써내곤 했다.
나의 그런 악필을 알고 있는 담임선생님은 글짓기대회가 있으면 먼저 내게 글을 쓰게 했다. 그리고 경미가 옮겨 썼다. 경미의 글씨는 반듯했고 어린 눈에도 아름다웠다. 경미는 내가 쓴 글을 옮겨 썼고, 나는 잘 쓰인 글 맨 위에 이름을 적어내곤 했다. 그렇게 경미의 글씨와 나의 글이 어우러진 작품은 언제나 수상을 했다.
경미가 시험기간이면 우리 집 불이 꺼진 후에 잠든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 집은 언제나 9시면 불을 꺼야 했다. 전기세를 걱정하는 엄마는 빨리 자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나는 엄마가 불을 끄고 나가면 작은 스탠드불에 의지한 채 소설을 읽곤 했다.
가끔 우리 집에 불이 꺼진 걸 확인하는 경미의 모습을 그려본 적이 있었다. 경미네 아빠가 경미네 엄마를 때린다는 소문은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경미가 내 글을 옮겨 쓰기 위해 방과 후에 남은 교실에서 경미가 글을 쓰다 답답했는지 소매를 걷었다. 나는 동생보다 작은 경미 옆에서 지루해 하품이나 하다 문득 경미를 쳐다봤고. 경미의 팔이 정말 하얗다는 생각을 하다가 눈에 들어온 건 퍼렇게 멍이 든 자국이었다. 멍은 크고 멀리 퍼져 있었다. 아무 말도 못 했다.
경미는 원고지 안에 또박또박 글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경미의 팔에 든 멍이 눈에 들어오자 다시 경미의 다리에도 목 뒤에도 시퍼렇게 든 멍이 보였다. 나는 슬퍼져서 그만 경미에게 집에 가자고 말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경미도 선생님도 아무 말이 없었다. 경미는 자신의 글씨로 제출되는 내 글을 옮겨 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시간이 흘러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경미의 아빠가 집에서 목을 매고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 집에 남겨진 작은 몸집의 큰 목소리로 웃곤 했던 경미의 엄마를 떠올렸다. 그리고 엄마 옆에서 살겠다며 모든 걸 정리하고 내려온 경미가 보고 싶었다.
하나 틀리면 한 대를 맞는다는 말을 경미엄마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경미는 키가 150 정도였고, 나보다 공부를 잘했으며 아이들과 한 번도 놀아본 적이 없어서 시골 아이들의 투박한 표현에 의하면 아방이 죽어도 안 돌아보겠다던 그런 아이였다.
나는 동창들 중 유일하게 경미네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했다. 누런 베옷에 파묻힌 경미와 경미엄마는 밝게 웃으며 날 반겼다. 언젠가 경미를 주인공으로 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 경미가 부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