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나도 그렇게 된다

젊은 게 벼슬이 아니 듯 나이 많은 게 죄는 아니다

by 레마누

저녁거리를 준비하러 집 근처 마트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 기름집에 들러 참기름을 사고, 고깃집에서 소고기국거리를 사고 걸어오는데 할머니가 옷가게 앞에 서 있었다. 도로에 붙은 집이었는데 나무계단이 두 개 있었다. 익숙한 길이었고 좋아하는 옷가게라 오늘은 일찍 문을 닫았네. 하며 걷고 있었는데 마치 짠 듯이 내가 지나가는 그 순간 계단 위에 서 있던 할머니가 나에게 쓰러졌다.


할머니의 손이 내 아랫배와 그 밑 어딘가에 닿았다. 순간 놀랐지만 쓰러지는 그분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오갈 데 없어 황망한 할머니의 두 손을 잡으며 "괜찮으세요?"라고 했다. 그분은 계단이 두 개인 줄 몰랐다며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많이 놀란 듯해 보였다. 할머니, 정말 괜찮으세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세요? 미안해요. 미안해. 내가 정신을 못 차려서. 늙지 말아요. 늙으면 이래요.


가슴이 아려왔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면서 미안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하던 그분은 돌아서서 제 갈길을 갔고 나는 왼손에 마트비닐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면서 생각했다. 그분은 얼마나 놀랬을까. 늙지 말라는 말은 요즘 들어 부쩍 늙은 기분이 드는 내게 오히려 상쾌한 바람이 되어 다가왔다. 여든은 넘겼을까. 마른 장작처럼 바짝 말라버린 할머니는 너무 가벼워서 갑자기 덤벼들었지만 넘어지지 않고 그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분의 눈에 나는 그저 철없고 젊은 여자였을 것이다. 막둥이네 반모임에서 나이가 제일 많아서 가기 싫다고 징징댔던 것도 모르고 그분은 그저 자신보다 한참 어린 내게 미안하다는 말과 늙지 말라는 말만 반복했다.



촌에 살던 때 일이다. 농사를 짓다 보면 인부를 구해야 하는데 우리 동네에서 제일가는 인부는 좌준이어멍과 해진이어 멍이었다. 그분들은 못해도 팔십은 훨씬 넘겼지만 누구보다 빠른 손놀림과 결코 쉬는 법 없는 부지런함으로 동네 사람들의 선망을 받았다. 농사일이란 게 비가 오는 날이면 쉴 법도 한데 두 분은 비가 와도 소일거리를 찾아서 하루 일당을 채웠다



그렇게 번 돈으로 아들들 집을 사 주고 땅을 샀다. 사람들은 며느리 좋은 일만 한다고 쑥덕거렸지만 누구도 두 사람의 굽은 등이 밭을 오가는 것을 말리지 못했다. 아흔 살이 넘도록 일만 하다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최근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와 "삶이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같다"를 읽었다. 두 책 모두 80이 넘은 노학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한 책이다. 내용은 알차고 좋았다. 그런데 아무 감동이 없었다. 왜 그럴까 생각을 해 봤는데 나는 이미 열심히 살고 있는 제주의 할머니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주변에는 멋진 생을 산 사람들보다 어렵고 힘든 삶을 가까스로 영위한 혹은 죽지 못해 살아 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살아 있는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저 태어났으니 살아낸 것이다. 즐기는 삶이 아니라 견디는 삶이었다.



글도 모르고 말도 길게 못 하는 그 사람들은 해가 뜨면 밭에서 일을 하고 날이 저물면 집에 돌아와 고된 몸을 눕혔다. 자연에 충실한 삶을 살면서도 자식들만은 자신과 다른 삶을 살기를 기원했다. 읽을 줄 모르니 기도문도 몰라서 그저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말로 일 가기 전에 몇 마디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들의 말은 짧다. 점점과 허, 참.으로 모든 것을 말했다. 멋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을 말이 없고 무식한 제주할머니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분들의 열불 터지는 속을 보지 못해 하는 소리다.



나는 많이 배우고 멋있는 노인들을 모른다. 만난 적이 없다. 책에서 만난 그 사람들은 너무 멀리 있다. 나는 욕 잘하고 투덜이에 한 번에 좋다는 소리를 해 본 적이 없는 제주할머니들을 알 뿐이다



밥 먹으러 가자고 하면 집에 먹을 게 많은데 뭐 하러 밖에 나가서 먹느냐고 하고, 비싼 옷 사다 주면 입을 옷이 한한 했는데 필요 없다며 가져가라고 하고, 여행 가자고 하면 덥고 힘들다며 하면서도 경로당에 가서는 아이들이 여행 가자고 한다고 자랑하는 할머니들만 알고 있다.



좋은 걸 쉽게 좋다고 못 하고 행여나 트집 잡힐까 자식들에게 잘한다는 말보다 조심하라는 말을 먼저 하는 제주 할머니들은 모든 게 무서워 그저 속솜하라고만 한다.



오늘 할머니가 했던 말이 가슴에 꽂혔다. 늙지 마라. 자네랑 늙지를 말아. 두서없이 건넨 그 말속에는 나도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나이가 드니 별 수 없다는 뜻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느닷없이 제 몸이 쓰러지는 걸 받아낸 할머니 눈에는 그나마 젊은 여자에게 건넬 수 있는 미안함의 최대표시였을 것이다.



아무리 괜찮다는 말을 해도 몸 둘 곳 없이 미안해하는 그분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나이 드는 것은 죄가 아니다. 누구나 나이를 먹는데 또 마음은 저 혼자 세월을 비켜가서 몸은 늙고 마음이 젊은 슬픈 현실이 찾아온다. 제 맘대로 되지 않는 육체를 가진 채 매일 미안해하며 살아간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분은 잘못한 게 없다. 계단 두 개를 하나로 생각해서 내려오다 휘청이는 건 9살 막둥이도 하는 실수다. 나이가 많아서 그런 게 아니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을 두고 마냥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젊은 게 벼슬이 아니 듯 나이 많은 게 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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