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1
2023년 가을 동안 매주 월수금 저의 단편소설집 여자들이 사는 도시 중 일부 소설을 선보입니다,
다른 이야기들이 궁금하신 분들은 교보, 알라딘, Yes24, 밀리의 서재, 윌라 등에서 검색해서 찾아보시면 됩니다, 멋진 이 가을 멜로 단편선과 함께 해 주세요^^!
민은 그런 여자였다. 남자에게 최선을 다하는 여자. 그 최선으로 남자가 질려 도망가 버려도 원망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여자였다. 다른 여자에게 남자를 빼앗겨 버려도 그저 눈물만 흘리는 종국에는 걷어 차이는 착한 여자다. 그렇다고 민이 정말 모자란 여자라는 속단은 금물. 중산층 집안막내로 부족함 없이 자란 여자다. 다만 취직 몇 달 만에 연애 스캔들로 권고사직하는 사랑에 죽고 못 사는 사랑 지상주의자이다.
지나친 감성이 이성을 압도 한다고 나 할까? 민이 그렇다고 정말 만만한 여자도 아니다. 그런 여자들이 있지 않은가? 하얀 도화지에 검은 얼룩 떨어뜨리듯 물들이고 싶은……. 민은 허리가 잘록해 H 라인 스커트가 잘 어울리는 여자다. 그리고 적당한 애교가 있어 남자의 가슴을 흔드는 여자다. 그런데 딱 그 순간이다. 그 첫 대면의 순간이 사라지는 순간 세상 이렇게 쉬운 여자가 없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정말 의지가 하나도 없는 쉬운 여자다. 그런 민이 답답하여 친구가 일주일 내내 붙잡고 얘기를 해주었는데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쉬운 여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 민이기에 남자의 작은 친절, 배려에도 쉽게 사랑에 빠진다. 추남이든 미남이든 키가 크든 뚱뚱하든, 말라 비틀어졌든 성격이 소심하든 대담하든, 주사가 있던, 기독교든 천주교든 그래서 민은 정말 사랑에 빠지기 쉬운 여자다.
남자에 대해 기호나 취향이 한곳으로 쏠리지 않아 활짝 열려 있으므로 어떤 남자라도 사랑스러움을 찾아내는 박애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다. 하여 민은 못 하는 것이 없는 여자였다. 그 다양한 남자들이 원하는 바가 정말 다양하기 때문이다. 쿠키를 먹고 싶다면 수제 쿠키를 예쁜 상자에 담아 사무실 배달을, 집밥 같은 도시락을 먹고 싶다면 퀵서비스를 불러서라도 손수 싼 도시락을 사무실로 배달해 준다. 피곤한데……. 그러면 서울 끝과 끝 아무리 멀어도 총알같이 달려와 대리운전한다. 남자가 허풍 떨 듯 친구들과 내기를 해서 그녀가 얼마 만에 달려오나를 시험하기도 했다. 하여 민은 늘 바쁘다. PPT 회의 문건도 척척, 관공서 서류 떼는 일도 하다못해 남자친구 강아지 산책과 배변 활동도 도와줘야 하기 때문이다. 청소와 설거지는 기본 옵션이니 말 다 했다. 끊임없이 남자를 만나고 항상 연애 중인 그녀의 얼굴은 사과 빛 홍조가 있어야 하지만 늘 두 눈 아래 다크써클과 꺼 칠은 피부가 자리 잡고 있다. 그녀가 헌신하는 남자들의 선물이다. 주변에서 피곤해 보인다는 말을 듣고 사는 민, 여권신장을 부르짖는 이 시대에 심하게 역행하는 것도 민 자신 ……. 사랑 받고 사랑 주는 행복한 연애를 하는데도 왜 늘 피곤한지 애써 알려고 하지 않았다. 뭔가 아주 사소한 무언가가 결핍되었던 것만 인지할 뿐. 그러나 그런 연애 패턴을 강제 종료 해야 했던 일이 벌어졌다. 마치 무협 활극처럼 …….
서른을 넘어 두 해 민이 연애안식년을 강제선언 당할 수밖에 없던 그 날!
발단은 회사 사장이었다. 시작부터 잘못된 것은 맞지만 민 자신이 욕하면서 봤던 아침드라마의 여주인공이 자신이 될 줄은 몰랐다. 착한 역이 아닌 불륜녀역에 캐스팅될 줄이야.
어느 날 야근을 하느라. 실은 애인의 퇴근 시간을 맞추느라 일을 만들어서 했을 때,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사장이었다. 뜨거운 홍차를 들고 방에 들어섰다. 도시의 푸르스름한 빛이 드리워진 방에 앉아 무심히 야경을 응시하는 사장의 옆얼굴을 보았다. 민의 가슴에 왠지 모를 서늘함이 흘렸다. 늘 사무적으로 대하던 사장이었는데 그 순간 민은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굵은 이마 주름을 찡그리고 야경을 응시하던 사장의 눈빛에서 섹시함을 느낀 건 지나친 비약일까? 하긴 민이 남자에게 빠져드는 순간이 딱 3초니 그리 이상한 전개도 아니다. 그날 남자 친구를 바람을 맞힌 것은 놀랍게도 민이었다. 민의 연애사에 있어 큰 변화였다. 민이 남자친구에게 주었던 모든 것 이를테면 정성 어린 음식, 대리 운전, 강아지 산책, 회사문서작성, 청소 그리고 섹스까지도 일절 단수되듯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뚝 끊어 버렸다.
어느 주말 남자친구는 민과의 약속을 잊은 채 숙취로 뻗어 있었다. 그날은 민이 5주전부터 말해 왔던 부모님과의 자리였다. 역시나 남자친구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죽을 먹이고 민은 어쩌지? 하면서 집안을 청소하고 있었다. 청소, 빨래를 해주고 나니 민의 주말이 증발하고 말았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남자친구가 급한 출장이 잡혀 다음으로 미뤘다고 핑계를 댔다. 엄마는 적이 못 미더운 말투로 전화를 끊으며 한마디를 덧붙었다. “요즘 애들 말로 헌신하다 헌신짝 된다더라…….” 곱씹을 새도 없이 옷 방 바닥에서 무언가를 집어 올렸다. 먼지가 덕지덕지 묻은 그것은 부드럽고 반짝이고 탄력이 좋은 스타킹이었다. 얼마 전 잠자리서 ‘스타킹 신고하면 어때?’ 하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민은 스타킹을 손에 쥐고 남자의 목을 조르는 상상을 잠시 했다. 대신 빨랫비누 조각을 깨끗이 빤 스타킹에 얌전하게 넣고 남자친구의 집을 나섰다.
그러다 결정적인 그 밤 이후로 먼저 방향을 튼 것이 민이었다. 항상 끝! 을 듣던 사람은 민이었는데 말이다. 민 자신도 모르던 사이에 질질 끌려 다니는 연애패턴에 신물을 느낀 것이다. 정말 그렇게 쉬운 여자 민은 결정적일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어려운 여자였다. 민을 만만하게 보던 남자친구는 민이 해주던 모든 것이 아쉬워 민을 잡았으나, 민은 그가 더는 아쉽지 않았다. 매달리는 남자친구가 어느새 찌질해 보이고 먼저 이별을 고하는 자신이 당당해 보여 맘에 들었다. 새로운 대상이 나타났기 때문일 것이다. 서늘한 표범 같은 남자! 그리고 수컷이 분명한 연륜 있는 남자! 찌질한 남자친구에 비해 새 애인 후보는 모든 면에서 어른 남자로 보였다. 사장에게 홀린 민은 워커홀릭이 되었다. 누구보다도 일찍 출근하고 누구보다 늦게 퇴근하였다.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사장의 비서를 자원하였다.
민은 여우가 아니라 마음을 들키는 것이 너무도 쉬었다. 차를 접대하거나 그날의 일정을 전하러 사장실에 들어갈 때 민은 사장을 만나러 가는 건지, 애인을 만나러 가는 건지 모를 정도로 들떠 보였다. 그것은 사장 본인의 눈에도 보였다. 그러나 사장도 그리 좋은 남자가 아니라 모르는 척하기보단 민의 행동을 보며 즐기고 있었다. 달콤한 사탕을 한 번에 와그작 씹어 먹어서 조각을 내는 대신 천천히 혀로 굴리며 핥는 것이 더 맛나듯 말이다. 사장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회사 일이 아닌 일에 분주한 것이 애인 때문이란 것을……. 그러나 민을 멀리하기엔 그의 일상은 자로 잰 듯이 박제돼 있었다. 본인의 매력이 그녀에게 얼마만큼 먹힐 지 궁금했다.
세월은 나이든 이에겐 시간으로, 젊은이들에게 사건으로 체감된다 하지 않던가?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이 소설의 페이지처럼 너무 많이 남아있었다. 결말이 예상되는 페이지를 넘기는 일만이 사장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젊을 땐 일이 1순위이었다. 요즘엔 강남에서 용 난다 라는 속담이 있지만 그는 개천에서 난 용이었다. 무거운 책임감과 타고난 승부 근성과 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공부와 일에 몰두했다. 아내를 만난 것도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노력으로 만든 출세 줄이었다. 회사 일개미로서 위로 올라간다는 건 그가 아무리 개천용이라도 한계에 부딪히는 일이었다.
주말마다 사장 이하 중역 산행에 대타로 간 게 천운이었다. 그날 부장이 가벼운 접촉 사고를 당한 것도, 그날 사장이 발목을 크게 삐어 그를 업고 내려올 젊은 사람이 자신 밖에 없다는 것도. 부장이 자신을 신뢰하게끔 동기들의 욕과 손가락질을 해도 충견 노릇을 마다하지 않은 것도.
기다렸다. 침착하게……. 어떤 기회가, 실체를 보여주지 않은 안개 같은 기회를 그는 끈덕지게 기다렸다. 그러다 사장 눈에 띄어 사장 딸을 만나게 된 것도 기회이자 자신이 만든 노력의 결과였다. 장인으로부터 회사를 물려받고 무능한 경영진을 자신의 사람들로 갈아치웠다. 평사원부터 닦아온 중국어와 중국 내 다져놓은 인맥들로 회사를 크게 키워놓은 일만 집중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도 그렇게 질주하는 일만 남았다고만 자신했다.
어느 날 심장에 무리가 왔는지 사무실에서 쓰러졌다. 처음엔 갑갑한 병실에 누워 지내는 것이 불안하고 회사 일이 걱정돼 자주 보고를 받았다. 그러다 조금씩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지나온 세월을 반추하게 되었다. 문득 건강 앞에서 무너지니 앞으로의 삶이 허무하고 숨이 턱턱 막혀 오기 시작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경주마 같은 인생에 회의가 느껴졌다. 항상 자신만만하게 보였던 미래가 처음으로 암흑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차고 넘치는 인생의 정점에서 말이다. 외롭다는 느낌이 갑자기 ‘훅’하고 냉혈한인 그의 가슴속까지 밀려들어 왔다. 술 한잔 같이 할 절친도 없고, 아내에게는 정이 안 가고 마음 한 조각 나눌 사람이 없었다. 성격 또한 팍팍한 편이라 일하는 것 외에 남는 시간들을 뭐로 보내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른한 봄의 아지랑이가 올라오던 어느 날 차창 밖으로 본 젊은 연인들을 보았다. 그네들의 얼굴이 싱그럽고 행복해 보았다. 보다 보니 언제 저런 얼굴로 살았던 적이 있었나? 자신에게 반문하게 되었다. 자신의 인생에 아득한 블랙홀처럼 가늠할 수 없는 큰 구멍이 뻥 뚫린 듯 했다. 허무, 우울, 아쉬움 같은 감정이 그 구멍 속으로 자꾸만 빨려 들어가는 듯 했다. ‘권태’ 혹은 중년남자의 뒤늦은 사춘기 …….
그런 마음의 공허함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회사 여직원들의 가는 발목, 목덜미 옷깃 사이로 보이는 솜털을 보고 남모를 흥분했다. ‘미친 거지 미친 거야’ 그녀들의 눈부신 젊음을 흠모하며 갈망했다. 다잡아지지 않은 욕망을 누르느라 골프에 여행에 실내 클라이밍 등에 열중해 보아도 그 남모를 엿보는 것이 멈춰지지 않았다.
어느 늦은 밤 이성이 검은 욕망을 누르지 못해 임계점에 도달한 날. 차를 몰고 달렸다. 한적한 변두리룸살롱에 들어섰다. 그는 제일 어린 여자를 들여보내라 했다. 여자가 상체를 숙이고 사장의 잔에 술을 따르려는 순간 보인 건 천으로 된 낡은 브래지어였다. 한 잔을 마시고 여자는 따르고 한잔을 마시고, 여자가 따르고 또 마시고 그렇게 취해갔다. 바랜 브래지어가 시야에 들어서는 순간 사장은 저 헝겊을 풀어 헤치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사소한 오점조차 허용치 않은 인생을 살았으며 그런 일로 허방을 짚어 수직낙하는 없을 거라 자부한 그였다. 그 밤 신념은 어두운 욕망에 무너졌다. 아니 오히려 시작을 알렸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그게 첫 외도였지만 바람에 대한 명언이 있지 않은가? 한번 바람 핀 놈은 없다는…….
그 후 사장은 줄기차게 매우 충실한 바람을 피웠다. 다른 이들처럼 알콩달콩 저녁에 이런저런 얘기 하면서 두둑한 마누라 뱃살을 주무르는 일상은 없었다. 정으로 사는 부부가 아니었기에……. 바람을 피우기 때문에 사장은 돈을 더 열심히 벌 수 있었고 남편 의무에 충실하다는 이상한 논리까지 생겼다. 사장은 돈을 벌어다 주고 부인은 자식들을 기르고 부인 또한 딴짓해도 사장은 안사람 역할만 충실히 해준다면 상관없다는 주의였다. 너나 나나 가정이라는 틀만 유지하자.
그러던 참에 민이 회사로 입사했다. 민이 회사 여기저기로 걸음을 옮길 때 갈색 머리가 등 뒤에서 물결 칠 때, 상사에게 혼이 날 때 몸을 비비 꼬며 얼굴을 붉힐 때, 서류를 볼 때 미간 사이의 작은 주름이 골을 이룰 때도, 회식 자리서 술을 마시다 입술에 달린 소주 방울을 손등으로 쓱 닦을 때도,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자지만 빈틈 많은 민이 계속 신경이 쓰였다.
어느 날 급히 어딘가로 가려고 택시를 잡으려는 민을 태워준 그는 사무적인 대화를 하면서도 민을 탐했다. 민의 향기, 어깨와 어깨 사이의 긴장감도 그리고 급정거해 민이 그의 무릎에 쓰려졌을 때 그는 그녀의 몸에서 나는 엷은 라벤더 향과 탄성 있는 육체에 매혹 당했다. 아이가 새로운 장난감에 홀리듯, 사춘기 소년이 새 게임기에 홀리듯, 스무 살 여자가 새로 산 구두의 광에 홀리듯, 결혼을 앞둔 신부가 영원한 사랑의 상징인 다이아반지에 홀리듯, 새롭다는 것에 마력은 강해 다시 새로운 무언가가 대체 되지 않는 한 꽤 영향력이 있다. 그래서 부러 사장은 삼류 선수가 하듯 민에게 애써 다가서지 않은 것이었다. 그저 민을 관찰했을 뿐이다. 꽤 긴 시간 동안....... 회사 내에 민보다 어리고 몸매 좋은 여직원은 차고 넘쳤다. 그러나 사장은 그녀만을 탐했다.
남녀 간 보이지 않는 긴장감은 게임이나 마찬가지다. 상대를 탐색하고 약점을 알아차리고 그 약점에 기대여,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트려 절대 복종케 하는 것. 마치 재규어가 여린 먹잇감의 목을 한 번에 뜯을 기회를 엿보듯 민의 빈틈을 계속 엿보았다. 용의주도하게 말이다 거드름을 피우며……. 사장은 회사 내에서도 이런 상상을 하며 그것으로 생기를 찾아갔다. 그날 아침 복도를 지나다 민과 다른 직원이 하는 대화를 엿들었다. 민은 조금 흐느끼면서 곧 헤어질 거 같다고 말했다. 그 날 밤 회사 사무실에 들른 것도 민이 있으리라 생각했고 민은 역시 멍청한 애인을 기다리느라 사무실에 남아있었다.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걸 사장은 잘 이용할 줄 알았다. 남들은 철면피라는 자신을 보고 민의 가슴이 움직일 것은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 “사장님 쿠키 좀 드셔 보세요…….” 차와 함께 쿠키를 내와도 풋 애인에게 하던 걸 고대로 하네 하면서 이상하게 웃기기까지 했다. 민을 조소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자들에게 못 느낀 귀여움이 그녀에게 있었다. 민은 바스러뜨리고 싶은 그러면서도 조금 천천히 시간을 들여 즐기고 싶은 여자였다. 민과 함께하면서 사장은 아주 즐거웠다. 병적인 욕망도 희석되는 듯 했다. 폭음하는 버릇도 사라졌다.
상해 출장 가던 날, 사장은 갑자기 선물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호텔 야경으로 보는 상해의 마천루와 바다를 보니 문득 마음이 출렁거렸다. 민과 연애를 하니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것이니라. 민의 가는 목덜미에 에메랄드 목걸이를 걸어주는 상상을 하니 뿌듯하기도 했다. 민이 만나온 남자들과는 클래스가 다른 선물이 될 것이다. 민 또한 흡족하여 자신에게 더 빠질 것이라는 계산도 섰다. 그래서 상해의 푸른 바다를 닮은 에메랄드 목걸이를 준비했다. 물론 두 개로! 하나만 산다는 것은 아무리 민에게 푹 빠져 있어도 페어플레이에 어긋나는 것이다. 사장은 내심 자신의 이 능력에 감탄했다. 물론 두 여자에게 똑같은 목걸이를 사 줄 수 있는 경제력과 지배욕을 말하는 것일 거다. 세상에 감출 수 없는 것이 감기와 연애라고 했던가? 민이 목걸이를 하고 다니자. 몇몇 여직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 소문이란 것이 자신에게는 제일 늦게 전달되는 것이라 그들의 어쭙잖은 사탕 같은 유희는 계속됐다.
어느 날 연락도 없이 사장 부인이 방문했다 마침 사장은 자리에 없었다. 사장 부인은 차를 내오는 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 보았다. 마침 그녀의 목걸이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민은 당황해 평소 잘 붉어지던 뺨이 더 붉어졌다. 사장부인은 예의 바르게 부잣집 딸로 키워진 교양을 애써 긁어 모아 민에게 목례하고 사장실을 나왔다. 회사를 나서자 약간 휘청거렸다. 그간 남편의 수상쩍은 행동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늘 여자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은 좀 달랐다. 소년처럼 들떠서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거나 아니면 느닷없이 집밥 요리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거나 이따금 혼자 웃거나 ……. 자신이 기억하는 한 비웃음은 본 적이 있지만 그런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예전 바람과는 다른 걸 직감을 했지만 이런 여자애에게 빠지다니……. 남편에 대한 배신감보다 이상한 패배감이 솟구쳤다.
사장 부인이 회사를 떠나자. 그 즉시 사내에는 똑같은 목걸이를 한 두 여자가 마주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수군거림이 민에게까지 돌고 돌아왔지만, 민은 설마 하며 넘어갔다. 그러나 설마 하는 말이 사람을 잡듯 민은 알지 못했다. 그날이 막상 닥쳐 오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