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 부인은 막돼먹은 여자가 아니라서 며칠 후 자신에게 돈을 자주 빌리는 드센 언니들에게 그간의 일을 한숨 쉬며 흘렸다. 물론 민을 어떤 수단을 취해서든 떼어버릴 심산이지만,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언니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뻔히 그려졌다. 언니들은 분명히 자신에 대한 자격지심을 그 여자에게 쏟아 부을 것이다. 돈에 대한 미안함인지 아니면 동생에 대한 형제애인지 그도 아니면 잘 사는 동생에 대한 시기심인지 그 모든 감정을 응축시켜 언니들은 회사로 몰려갔다. 회사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언니들은 곧장 사장실로 진격했다.
오후의 나른함이 퍼져서 사람들이 지쳐갈 때 무협 활극이 펼쳐졌다. 언니들은 민을 사장실에서 다짜고짜 끌어내 모든 직원이 다 보는 한 가운데서 민의 머리채를 쥐어뜯고 마구 주먹세례를 퍼부었다. 민은 곧 입술이 터지고 눈가의 실핏줄이 터져 퍼렇게 멍이 올라왔다. 여자들은 집단 광신도들처럼 악에 받쳐 세상 험하디 험한 욕은 다하면서 블라우스를 잡아당겨 하얀 가슴이 훤히 드러나게 했으며,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때 마침내 민을 땅바닥에 패대기 쳤다. 그 위로 멀찍이 떨어져 이 모든 것을 관망하던 사장 부인의 얼음장 같은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악다구니가 사라지고 그 드잡이할 대상이 넝마가 되어 너덜너덜 해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저 자신들이 마무리 할 책상으로. 한참을 쓰러져있다. 누군가가 던져준 재킷을 머리에 쓰고 민은 도망치듯 겉옷과 가방을 챙겨 집으로 돌아갔다.
그 밤 내내 민은 자신이 당한 것보다 사장만을 생각했다. 사모님이 화풀이하지 않았을까? 그 사람은 나보다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내가 이해해야지……. 그는 가정이 있는 사람이니까 나보다 더 치도곤을 당하고 있을 거야 자신보다 그의 안위를 걱정했다. 다음날 출근을 준비하는 민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비서실의 김 대리였다. 집 앞 카페로 나와 달라는 말이었다 카페서 만난 김 대리는 당혹스런 표정이었다.
“ 민 씨 얼굴이 안 됐어요……. 사장님 지시사항을 대신 전하러 왔어요. 어제일은 유감이며 오해로 빚어진 일이니 마음 쓰지 말라고요 그리고 회사는 ……. 음 회사에 물의를 일으킨 민 씨는 퇴사처리 하겠다고요. 오해의 소지가 있다면 진심으로 미안했다고 전하시네요 그리고…….“
쭈뼛거리며 봉투를 내밀었다. 평소 사람 좋기로 소문난 김 대리의 눈에 연민이 가득 찼다. 그는 몹시 당황하면서 황급히 자리를 떴다. 상처를 가리느라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민은 슬며시 웃음이 났다. 웃음의 의미는 민 자신이 가장 잘 알리라. 얼굴이 푸르딩딩하게 부은 민의 얼굴이 이내 일그러졌다. 민은 핸드폰을 꺼내 잠시 바라보았다. 민의 눈에서 파란 섬광이 잠시 떠오르다 사라졌다. 멍한 표정으로 몇 분을 봉투와 핸드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침내 무엇이 들었는지 짐작인 가는 민은 봉투를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민은 차갑게 식은 아메리카노를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마셨다. 그리고 카페 문을 열고 거리로 나섰다. 마지막 늦가을을 불태우듯 거리는 붉은 카펫이 펼쳐져 있었다. 불륜으로 짓밟힌 그래서 넝마가 된 지금이지만 하늘은 높고 청명한 가을날이었다. 한가한 평일 오후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고 매우 평범해 보였다. 민 또한 그 사람들이랑 다르지 않았다고 느꼈지만, 그 무리 속에 속하는 것은 어쩌면 요원한 일이 될 것만 같았다.
민과 사장은 딱 한 번 그 선을 넘은 적이 있었다. 바로 그날 민이 뜨거운 홍차를 가져다 주던 날 사장을 부축해 주다가 뜨거운 키스를 나누게 되었다. 사장의 입술에선 안주로 먹었는지 멜론 맛이 났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시작이었는데 오해의 소지를 주었다면 진심으로 미안했다니……. 헛웃음만 나는 민 이다. 민은 자신이 그 동안 해온 행동들이 자신이 정말 쉬운 여자라서 그런지 반문했다.
사랑은 결핍된 곳을 채워주고 과한 것은 덜어주고 통하면 좋은 것 아니던가? 그래서 애인이 정말 사소한 부탁을 해와도 애인이 편하다면 내 한 몸 피곤해도 해 주고 싶었다. 민도 자신을 향한 친구들의 걱정, 회사에 돌고 있는 소문을 모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제어가 안 됐을 뿐이다. 민 이라고 사장의 더러운 소문에 대해 모르지 않았다. 처음 입사 때부터 사장의 눈길이 심상치 않았고, 그 눈길이 뱀 같다고 느낀 적도 있다. 그 눈길이 발목부터 휘감아 치마 속 깊은 곳까지 타고 올라온다고 느껴졌다. 남자에게 약한 건 정확히 민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약했던 것뿐이지 그 외의 남자에게 약한 것은 아니었다.
입사 동기들 사이에서도 사장의 묘한 성희롱은 이미 유명했다. 손이나 피부로 터치를 하지 않을 뿐이지 눈길 샤워 안 받은 직원이 없었다. 그렇게 몸서리쳐지게 싫었던 사장이 연애대상이 된 것 또한 의외였다. 사람의 생각이 상황을 만드는 것이 아닌, 상황이 사람에 대한 생각을 전복하는 경우도 있나 보다. 사장과 통하던 그 날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는 애인에 대한 화가 머리끝까지 났었고 해야 할 일은 있었기 때문에 사무실에 남았던 거다. 민의 가슴 안에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울컥 솟았다가 내려 갔다를 반복했다.
애인은 또 일 핑계를 대고 회의 문건을 떠넘겼다. 며칠 전 스타킹여자를 만나러 갔을 것이다. 남자의 SNS를 뒤지고 뒤져, 그녀를 확인했다. 미모는 둘째 치고 당당한 눈빛 때문에 더 속이 부대꼈다. 왜 난 퇴근도 못 하고 이렇게 컴퓨터와 씨름 해야 하지? 화가 나다 못해 이런 못된 남자 끊지 못해 질질 끌려 다니는 자신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때 문을 열고 사장이 들어섰다. 순간 당황했다. 평상시 같으면 아주 어색해 하며 가방을 챙겨 나왔을 것이다. 이 이후 상황에 대해서는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심리였다. 사장이 차를 부탁했을 때 민은 빨강 립스틱을 다시 발랐으며 블라우스 옷깃도 두 개 풀어버렸다. 지지부진한 연애나 뭔가 꽉 막혀버린 관계도 안녕을 고할 때였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누군가가 이렇게 묘비명에 써놨댔지. 죽을 때 후회 말고 뭐든 해보자 그런 심산이었다. 그날 민은 뭔가 결심한 듯 홍차를 사장에게 쏟았다 뜨거운 것을 일부러 말이다. 사장은 화들짝 놀라 소파에서 껑충 튀어 올랐다. 민은 능청스럽게 사장의 주요부위를 닦아주는 시늉을 했다. 사장은 적이 당황해 하다 민을 바라봤다 사장은 취기와 홍조가 오른 불콰한 낯으로 민을 바라봤다. 민은 하얀 치아가 살짝 보이게끔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남자를 유혹할 때 짓는 백만 불짜리 미소! 빅토리아 시크릿 새틴 속옷을 장착한 가슴이 잘 보이겠끔 몸을 의도적으로 트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 두 눈이 얽히고 사장이 마침내 민은 잡아 끌어 당겼다. 민은 사장의 가슴팍으로 쓰러지며 속으로 뇌까렸다.
‘ 지겨워 이젠 정말 끝이야! ’
순수한 민, 남자에게 헌신하는 민, 사랑에 항상 도취하여 늘 사랑 안에 살던 민도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늘 수동적이었던 민에게 최초의 도발이었다. 원하는 것도 같고 상황에 떠밀려 그렇게 시작된 관계였다. 좀 더 다른 자신이 되고 싶었다. 늘 바보 같다고 손가락질 당하고 휴대폰 알림에 항상 예민했다. 그 기다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늘 사랑 받기 원했고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궂은 일도 마지않았던. 그렇지만 애인이 아닌 비서, 심부름꾼, 요리사의 다른 이름으로 대체 대던 민은 그렇게 자신 안에 어떤 것들이 사라지는 순간을 맞이했다.
사랑이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황금 같은 계절. 그래서 더욱 사랑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계절 그 사이로 민은 많은 상념에 휩싸였다. 뱀 같은 사장의 또아리 같은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사장과 외제 차를 타고 마치 똑같이 대단한 사람인 냥 사람들에게 대우를 받는 것도 싫지 않았다. 사장과 더불어 대접받는 특별한 존재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늘 애인 옆에 꼭 붙어 있어도 그런 대우는 처음이었다. 사장이 자신의 목에 에메랄드 목걸이를 걸어주던 날. 서랍 안에 잠자고 있던 남자친구와의 커플링을 꺼내보았다. 이렇게 흘러 가나도 싶었지만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사장 또한 대상만 바뀌었을 뿐 민의 공허함을 렌트 하는 대상이었을 뿐이니까.
민은 비로소 카오스 같은 연애를 내려놓고 연애안식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투에 얼마가 들었는지 모르지만 따뜻한 나라에서 잠시 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민이었다. 운이 좋다면 괜찮은 남자를 만나 꿀 같은 여행을 즐길 수도 있겠다 싶은 민 이다. 구두 아래 낙엽이 경쾌하게 바스락거렸다. 홀로 걸어가는 민의 모습이 왠지 희망차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