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사는 도시

part 2-1

by 강경아

민은 에메랄드 빛 파도를 보며 코스모폴리탄을 마셨다 필리핀 메이드들은 코코넛 같은 달콤한 목소리로 맴을 ‘맘’처럼 발음했다. 엄마……. 몇 달 전과는 전혀 다른 일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릴없이 리조트 수영장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다음 기회를 엿볼 새도 없이 하긴 민에겐 그럴 의지가 털 끌마저 남아있지도 않은 터였다 여행이라고는 했지만 유배나 다름없는 나날들이었다. 진저리나는 도시의 소음과 엿같이 끈적한 사람들도 그리웠다. 은퇴를 앞둔 백인이 필리핀 여자와 있거나 프랑스 게이 청년이 엄마와 동행하는 곳으로 무척이나 평화로운 곳이었다. 룸서비스와 마사지를 번갈아 하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간절히 혼자만의 시간을 바랬던 것이 우스울 정도로 민은 피로해졌다. 문득 악다구니 치는 서울이 그리웠다. 민이 원하면 언제든지 리턴티켓을 사용할수록 있었다. 그저 조금 망설였다. 테스를 조금 읽었다. 그냥 책은 지루하고 이해도 안 갔다. 요즘도 테스 같은 여자가 있나 싶기도 하다. 항상 다음을 생각하면 골치가 아프다. 일련의 경험으로 인해 순진무구함과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막상 서울로 돌아가는 것은 미루게 된다. 불안이 느껴지면 목에 건 에메랄드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게 된다. 실패한 전리품으로서 간직하는 것이 아니다.

교훈이나 그런 것은 더욱이 아니다. 민은 그런 것을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나이브한 감성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저 민이 가지고 있는 소지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옳다 소장가치가 있다. 그리고 반짝인다.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민은 애써 스스로를 북돋는다 다시는 바보 같은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나는 아직 젊고 아름다워’ 에메랄드 목걸이가 민의 마음을 대변하듯 눈부신 햇빛에 푸른빛을 반사했다.

민의 마음속에서는 폭풍이 일고 있었지만 리조트에서의 생활은 지루하다 못해 부드럽게 일렁이는 파도와 같이 유순하게 지나갔다.

" 테스군요 " 온지 며칠만의 듣는 한국말에 하마터면 촌스럽게도 눈물이 날 뻔했다. 선글라스 사이로 본 음성의 소유자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보이는 표범 같은 날렵함을 가진 여자였다. 곁에는 헬스 잡지에서 빠져나온 듯 한 나른한 표정을 짓는 남자가 있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뭐라고 속삭이더니 남자를 보냈다 " 그 목걸이 아가씨 레벨은 아닌데 아주 언밸런스 해!~ " 민은 너무 당당한 그녀의 말에 압도돼 감히 반박할 의지가 사라졌다. 다음날부터 민은 여자와 다녔다 민은 어딘가 위협적이고 나른한 분위기의 여자가 나쁘지 않았다. 간간히 여자가 들려주는 남자, 돈, 그리고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밌었다. 민이 애써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신경도 쓰지 않았다. 헤어지기 전에 여자는 민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 여자는 언제든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할 수 있어 그게 여자의 힘이야 ! "여자가 떠나고 민은 비치백에서 거액의 수표를 발견했다. 그녀의 동정인지 무엇인지는 몰라도 고마웠다.다시 서울로 돌아갈 수 있겠다 싶었다. 내가 가장 익숙하고 잘 살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하고 다르게 살리라 다짐을 했다.


‘난 변할거야 과거의 난 버리는 거야!‘


민은 짐을 꾸릴 때 일부러 테스를 놓고 왔다. 대신 표범 같은 그 여자에게 간단한 메모를 그 책에 남기고 왔다. 언젠가는 다시 볼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남자를 건지지는 못했으나 민은 자신에 대해 머리가 아플 정도로 생각을 해 보았다. 애써 친구들하고 비교를 하느라 불행하지도 않겠노라 다짐을 했다.


민은 서울에서 돌아온 뒤로 거액의 수표는 잔고로 넣어둔 채 예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그러나 달라진 점은 일과 혼자만의 시간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썼다 애인에게 봉사하느라 늘 피곤했던 삶과는 다른 삶이었다

어느 비오는 저녁 민은 빗소리에 눈을 떴다.


- 뚝 또르르똑딱 똑딱 똑또르르 - 갑작스런 한기에 민은 루이보스차를 한 잔 마셨다. 암막 커튼을 덮은 창에 백열등만이 빈 방을 밝혔다. 갑자기 모든 것이 두려웠다 자신이 무생물이라고 느껴졌다. 괜스레 양팔을 비벼봤다. 혼자인 게 너무 싫었다. 누구라도 같이 있고 싶은 밤이었다. 핸드폰 주소록을 뒤져봤다. 늘 애인이 우선순위였던 민에게 남아있는 이성은 별로 없었다. 더 이상 이렇게 숨 죽은 배추처럼 지내기도 싫었다.민은 전신거울 앞에 섰다. 헐렁한 티셔츠와 반바지를 벗었다. 거기엔 아직 싱그러운 가슴과 남자들이 환장할 만한 곡선을 가진 여자가 서 있었다. 민은 옷장 안에서 충동적으로 원피스를 꺼냈다. 전 애인에게서 받은 선물이었다. 붉은 새틴 드레스! 몸의 곡선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드레스였다. 사업상 파트너와 같이 하는 자리에 그 옷을 입혀서 남자가 데려갔을 때 수치심을 느꼈지만 남자가 허리에 팔을 강하게 두르고 있어서 몸을 뺄 수도 없었다. 아름답지 않은 추억의 옷이었는데 민에게는 고급쓰레기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이럴 때 입고 나설 수 있는 변변한 옷이 있어 다행이었다.


오랜만에 정성스레 화장을 하고 트렌치코트를 입고 나섰다. 서울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목걸이를 걸었다. 민에게 이 밤을 즐기라는 듯 에메랄드 목걸이가 반짝였다. 예전에 호기롭게 드나들던 호텔클럽을 들어갔다. 화려한 생활을 간접적으로는 겪어봤기에 어색하지 않은 듯 자연스레 들어섰다. 민은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차 비 오는 주말을 즐길 수 있었다. 부나비처럼 드나드는 젊은 남녀가 홀을 가득 있었다.


일단은 자리에 앉아 양주를 시켰다 취향저격이라고 해야 하나 그 남자는 민의 주류취향도 바꿔놓았다.

와인, 위스키 ,진 , 보드카 덕분에 모르는 게 없었다. 감미로운 팝송이 나른함 속이 들려왔다. 민은 서서히 기분이 몽롱해져갔다. 오랜만이고 혼자라 그런지 취기가 빠르게 올랐다. 공허함은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조금씩 사라지는 듯 했다. 눈이 점점 감겨온다.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장대 같은 하이힐을 신은 여자들 사이에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비에 통째로 최면이라도 걸렸나 더 붐비는 느낌이었다. 결국 몸이 뒤로 넘어갔고 그대로 누군가에게 안기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당황해 버둥거리자 오히려 하이힐이 벗겨지고 우스운 모양새가 됐다. 어떤 따뜻한 손바닥이 어깨를 감싸고 민을 일으켜 주었다. 민은 당황스러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세련된 차림의 남녀가 흥미롭다는 듯 민을 지켜봤다. 미지의 남자를 올려다 본 민은 ‘헉 ’소리를 냈다. 과거의 애인이 데려간 사업상 모임서 봤던 남자다.


식사 테이블 밑으로 애인가 자꾸 손을 치맛속으로 넣을 때 그 남자는 얼음장 같은 눈길로 민을 쏘아보았다 마치 본인의 여자가 바로 앞에서 부정한 짓을 한것처럼 얼음장 같은 눈 속에 불꽃이 보인 남자다 덕분에 민은 식사 내내 계속 사래가 걸려 헛기침이 나왔다. 모임 후 취한 남자를 차에 구겨 넣고 민이 차에 타려고 하자, 남자는 민의 팔을 재빨리 낚아채 민의 손에 명함을 쥐어주었다 불쾌해진 민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 대담하고 무례한 남자의 행동에 민은 기가 질려 재빨리 차에 올라탔다. 그저 기묘한 느낌의 남자라는 생각밖에는 차장 밖으로 살며시 보니 남자는 입이 비틀린 채로 서 있었다. 반년전의 일이었고 다시는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남자가 바로 앞에 서 있다. 그것도 그 남자가 경멸하던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남자 낚는 모양새로 말이다


" 여전하군요! "


남자는 묘하게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웃었다. 호박색 조명등에 비열한 웃음이 부드러워 보였다. 민은 심장이 차갑게 식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민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허리를 바짝 치켜세웠다. 도전적인 눈빛으로 허리에 손을 얹어 흐트러진 치맛단을 부드럽게 내렸다. 그리고는 온 신경을 집중해 몸을 부드럽게 돌렸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그리고 자리에 앉아 남은 술을 천천히 마셨다. 중간에 합석한 남자하고 호기롭게 시시껄렁한 농담도 하고 술도 나눠마시며 놀았다. 그 남자는 지난 못난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부산물 같은 남자였다. 그 남자도 민이 무시해서 화가 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끈적거리는 어린 남자를 떼어놓고 마침 호텔 밖을 나서는 참이었다.어디선가 미끄러지듯이 차가 민 앞에 섰다 또 그 남자였다.


민의 에메랄드 목걸이가 그 남자 손에 대롱 거라고 있었다. 민은 한숨을 쉬며 차에 올라탔다 남자의 얼굴도 보지 않고 옆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여전히 목걸이를 손에 그러쥔 채 남자가 나직이 말했다.


" 정말 나를 싫어하는 군 여전히! "


남자는 스스럼없이 예의 그 따뜻한 손으로 민의 목덜미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그제야 민은 처음으로 남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놀라울 정도로 따뜻함이 담긴 눈이었다. 마치 오래전에 알았던 것처럼 친밀감이 느껴졌다 엷은 갈색 눈이 괜찮다는 듯이 흔들렸다 민의 집으로 가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물이 엎질러지면 애써 닦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다시 담으려고 할 수도 원상복구 할 수도 없는 일 오히려 차분해 지는 민이였다. 나는 달라졌으므로 이 정도 남자는 얼마든지 떼어낼 수 있어 오히려 차분해지고 머리가 차가워지는 민이었다. 분명히 지분거리면서 하룻밤을 요구할 남자야


‘견적이 나와 차에서 내리는 대로 벗어나야겠어!’


민은 클러치 백을 손에 그러쥐었다. 고개를 모로 돌려 차창을 바라보았다. 습기에 잠식당한 서울의 깊은 밤이 차창사이로 아롱지며 흘러갔다 그 모습이 유난히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밤이었다. 남자는 운전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반 년전 그날은 그가 야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때보다는 훨씬 젊고 단정해 보였다 약간 거슬리는 것은 붉은 입술에 일그러진 입술모양이었다 심각한 생각을 할 때는 늘 그런 표정이었다. 그저 그렇게 입술을 찌그려트리진 않음 더 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민이었다. 차가 민이 사는 곳 근처로 왔다 일부러 한 블록 미리 세워달라고 했다 민은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 데려다 줘서 고마워요 “

" 이 동네 방범등이 ……. "


남자는 나직하게 말했다 민이 짜증이 난다는 듯이 땅바닥에 구두 굽을 딱딱거렸다.


" 나한테 바라는 게 뭐예요 ?! "


남자가 다가왔다 아주 천천히 조급함이 없이 다가왔다. 민이 오히려 감정을 드러내고 적개심이 보이는 데도 오히려 즐거워하는 표정이었다. 어느 새인가 민의 핸드폰을 손에 쥐면서 흔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가방이 열린 기척도 못 느낀 터였다. 자신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는 터였다 핸드폰을 돌려주며 " 아까 호텔 왠지 귀찮았는데 가길 잘 했네 이정민씨!~" 민의 예측은 하나도 맞지 않았다 방심한 탓에 연락처를 가져갔으며 이름도 이미 알고 있다니 남자가 민의 생각을 이미 읽고 있었다는 듯 이렇게 덧붙이면서 운전석에 올라탔다 " 회사서 본적 있는데 내가 임팩트가 없나보군 " 차가운 표정에서 순식간의 아이의 표정으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날 밤도 그 다음날도 기억을 해보려 애썼다. 아무리 곱씹어봐도 그러나 저렇게 기분 나쁜 남자는 본적이 없었다. 특히나 옷을 입고 있는데도 벗은 것처럼 대담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남자를 기억을 못할 리가 없는데……. 그러고 보니 전화도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