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호기인가 그렇게 일상이 흘러갔다. 거의 아무 일도 없다고 생각됐다. 그날 밤에 비에 이끌려 나갔던 일도 까마득했다. 남자가 없는 것 빼고는 예전의 민의 생활에 달라진 점은 없었다. 잔고안의 거액에 대한 것도 희미해져갔다. 무언가 민의 분위기가 달라지자 대시하는 남자들도 많이 생겼다. 예전처럼 욕망을 자극하고 뭔가 들뜨게 하는 남자들은 민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민도 다시는 그런 롤러코스터 같은 감정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다. 업무차 자주 통화하던 거래처 대리와 커피를 마시던 참이었다. 남자가 화장실을 간 사이 멍하니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남들도 미치도록 사랑해서 만나는 것은 아니니라. 민은 왠지 모든 커플들이 관성에 의한 연극배우처럼 느껴졌다 그저 휴일에 누군가를 만나고 이렇게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이 남들과 같아지는 일이라고 느껴졌다 ‘욕망’을 자극하는 남자와의 흥분감을 버리니 남들과 평등한 ‘권태’가 찾아왔다.
그때 어떤 여자가 슬며시 민에게 쪽지를 주고 가며 곁눈질로 어떤 방향을 가리켰다 그 시선을 따라가자니 그 남자가 민을 재미난 구경이 났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쪽지를 천천히 펴 보았다.
‘ 본인과 안 어울리는 표정인걸요. 정말 지루해 보여요 ’
남자처럼 자신만만한 필체로 이렇게 쓰여 있다. 얼굴이 화끈 거렸다. 남자가 장난을 치듯 하품하는 몸짓을 보였다. 표정은 재미있는 먹잇감을 발견했다는 듯했다.민은 화장실에 간 남자보다 건너편 남자가 불편해서 얼른 자리를 피했다. 화장실에 간 남자는 이미 안드로메다로 사라진 후였다. 마주치면 좋을 일이 없다는 걸 이미 본능으로 알고 있었다 민은 커피숍의 메모지에 급한 일이 생겨 일어난다고 짧게 쓰고 재빨리 일어났다.지하철로 바로 내려가는 순간그 때 전화가 울렸다.
“ 무슨 벌레라도 보듯이 나만 보면 그러는 거지? 참 이상하군.”
“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민이 졌다는 식으로 핸드폰을 든 채 마주 오는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하나도 서두르는 기색 아주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미끄러져 왔다. 민은 이미 심정적으로는 코너에 몰렸으나 쫄지 않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을 했다. 무슨 의도인지 케봐야 할 필요를 느꼈다.
“우리에겐 왜 이리 우연이 많은 거죠?”
말과 다르게 민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과 나의 바운더리가 잠깐 겹친다고 할 수 있겠지”
민은 자신도 모르게 힘이 빠졌다. 그 때의 한 순간을 무방비하게 들킨 이후로 나에 대해 잘 안다는 저 잘생긴 얼굴을 갈겨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끓어올랐다. 그러나 묘하게도 30분전보다 생기를 되찾는 자신을 발견했다. 민은 어느새 남자와 마주앉아 있었고 예전처럼 주눅 들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다. 내 본 모습을 알고 있으니 가식을 떨지 않아도 될 터였다.
“ 나를 어디서 봤다고요 ?”
“ 여자들과 다이다이할 때 , 차 대접을 해준 사람도 그 쪽인데?”
남자는 주먹으로 얼굴을 방어하는 제스쳐를 보였다 민은 땅 속으로 꺼지는 기분에 쌓였다 이마엔 땀이 솟았다. 그 때라면 보스와 부적절한 소문으로 여자들이 몰려와 집단린치를 했던 때였을 때다.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 제가 어떤 여자란 걸 알면서 왜 저한테 흥미를 갖는 거죠? 저랑 자고 싶으세요?”
돌직구를 날렸다. 그래야 빨리 남자의 속내를 알고 대응할 수 있을 듯 했다. 남자는 실실 웃더니 손수건으로 민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 모든 남자가 다 그런 것을 아니지만 당신이 날 원한다면 ?!”
‘이게 무슨 소리지 그것 말고 나한테 뭘 바란다는 거지’
왠지 기묘한 상대에게 잘못 낚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상대는 민보다 훨씬 우월하다 모든 면에서
“ 그날 말이야 …….당신이 여자들에게 두들겨 맞을 때 당신 눈을 잊을 수가 없었지 주눅 들거나 창피해하지도 않았어 그러니 그 여편네들도 슬슬 지쳐가고 내가 끼어들 틈도 없었으니까 그 개새끼 에게 아직도 그런 감정을 품다니…….”
남자는 손가락으로 민의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는 가리켰다
“ 무슨 감정이 남아서 간직하는 것은 아니에요 주홍글씨는 더더욱 아니고요 그저 예쁘니까 “ 남자는 듣기 싫다는 듯이 말을 잘랐다
“ 여행은……. ? 당신 관찰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져서 아쉬웠고 갑자기 내 무릎에서 만나니 어이없게 반가웠어! 그런데 날 못 알아보다니 섭섭했어. 나 같은 남자를!"
자아도취의 최고봉인 듯한 남자의 말은 재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설득력 있었다. 그날 호텔서 자신을 일으킬 때 살짝 행동은 거칠 었지만 눈길은 부드러웠다 며칠은 그 눈이 생각이 났었다.
“ 왜 저처럼 평범하고 어리석은 여자에게 관심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
민은 스스로가 고양이 앞의 쥐가 된 듯 한 느낌을 받았다. 고압적인 느낌 , 꼼짝달싹 못하는 이 긴장감! 그러나 심장은 아까부터 두근거리고 있었다. 민은 그 고압적인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 원하는 게 뭐예요? ”
“ 당신은 ?”민은 의자를 뒤로 빼 일어섰다. 말을 더 섞다간 피곤할 유형이다. 남자가 부드럽게 팔을 그러쥐었다.
“ 일주일의 반을 내게 주겠어?”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약혼녀가 있어 결혼은 관심 없지만 약속이자 의무 같은 관계야 ”민은 말을 가로막고 딱 잘라 얘기했다 " 그쪽이 알다시피 6개월 전에 세컨 짓하다 개망신 당한 거 몰라요? " 남자가 나직하게 말했다
" 그 일이 지난 지 꽤 됐는데 왜 그렇게 살고 있는 거지? 사랑이었나? 내가 보기엔 당신은 그 작자에게 잘빠진 스포츠카 같은 존재지“그러면서 민을 위아래로 훑었다 민의 가치를 눈으로 매겨보는 듯한 눈길였다. 민이 만면에 조소를 담은 채 날카롭게 말을 이었다 " 당신에게 난 뭐죠? 별 차이가 없는데 그건 일이 또 생긴다면 다시 멀쩡하게 살기 힘들 거예요 “
남자는 탁자에 명함을 내려놨다 " 약속하지 분명 지금과 같은 시체 같은 삶과는 멀어질 테니까 그 때는 당신에게 인간적인 연민이라도 있었지 지금은 …….시체와 별반 다르지 않아 내가 보기엔 말이지 세켠이라니 난 그런 부류가 아니야 “
이번에도 독설만 남기고 먼저 사라졌다. 묘한 승부심과 반발심을 주는 남자였다. 허나 틀린 말은 없었다. 티클 만한 자존심이라도 지켜야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생각으로 버텼는데 다 들켜버렸다. 명함을 봤다. 단정한 필체로 김윤이라고 적혀 있었다. 시체 같은 삶, 남자들에게 어필하려는 할수록 그들은 날 하대했다. 마음에 들게 행동할 수록 말이다. 그 남자에게 엮이면 비단 애인의 부인과 그 자매들이 회사로 몰려와 민을 드잡이 하려는 일보단 더한 일이 있을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다음날부터 남자는 다른 방식으로 민에게 어필을 했다. 처음엔 꽃을 보내왔다. 민의 집으로 말이다. 생화가 아닌 드라이플라워를 투명한 박스에 넣어서 말이다. 생화였음 화려하게 불타오를 붉을 장미를 일부러 말려서 말이다. 종잡을 수 없는 취향의 남자였다. 다음은 테스였다. 외도파트너였던 민이 받기엔 반어적인 책이었다. 민이 또한 테스 같은 여자가 아닌데 말이다. 정숙하란 소린가?
다음은 실내조명이었다. 그것도 조립식으로 말이다. 큰 것은 아니지만 소소하게 전해져 오는 택배 때문에 이제는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에게 눈치를 보는 지경였다. 참다 못한 민이 남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만하시죠 손가락을 핸드폰에서도 떼기도 전에 빛의 속도로 문자가 왔다. -조명 맘에 들어?
결국 약속을 정했다 시내에 있는 레스토랑 이었다.
‘아무 의미 없는 거야 거절의 의미로 가는 거야 정말 아무 관심도 없어’
레스토랑에 가서 김윤의 이름을 말해주니 바로 자리로 안내 받았다 윤은 흰 피부를 돋보이게 하는 검정 셔츠에 노타이로 지루하듯이 와인 잔으로 흔들고 있었다. 유리잔에 반짝이는 음영이 윤의 얼굴에 부드럽게 드리웠다 항상 거슬리던 입술도 멍한 표정에 펴져 있었다.민의 구두소리에 고개를 든 그는 놀랍도록 빠른 시간에 예의 그 비웃는 표정을 되찾았다 민은 앉자마자
" 아직 어떤 답도 한 적이 없는데 이런 식으로 푸시하는 거 질려요“
" 난 즉답을 들어야 하는 스타일인데 이렇게 인내심을 가진 적도 처음인데 윤이 말했다 하 민은 절로 한 숨이 나왔다
" 무례하단 생각은 아예 없죠? 윤이 포도주를 한 잔 민에게 따라주었다
" 안 마셔요 확실하게 거절하기 위해 나온 거예요"
민이 딱딱하게 말을 이었다. 윤이 포도주를 들이켜더니 몸을 일으켰다 민의 뒷목을 한 손으로 낚아채더니 입술사이로 포도주를 넘겨주었다. 혀로 민의 혀를 희롱하는 듯이 스쳤다. 민의 입술 사이로 포도주가 흘렸다 윤이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입술로 핥았다.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민은 심장소리가 귀까지 들려왔다. 벌떡 일어섰다. 재빨리 문손잡이에 손을 갖다 댔지만 역사나 윤이 빨랐다. 민이 윤의 품에 안긴 모양이 됐다. 귓가에 윤의 숨소리가 들렸다. 민은 더욱이 심장소리가 커졌다. 이대로는 윤에게까지 들릴 것 같았다 윤은 민의 어깨에 고른 숨만 내쉬었다. 그대로 꼭 안고만 있었다. 민은 오른쪽 손을 뒤로 뻗어 그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왜인지는 몰랐다 진정시키지 않는 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윤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렸다. 5센티도 안 되는 거리에서 윤은 여전히 민의 허리에 손을 얹은 채로 민을 내려다보고 민은 윤을 바라봤다. 엷은 갈색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민을 담은 채 바라봤다. 민은 살짝 미소를 머금고 윤의 이마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튕겨버렸다.
" 이제 좀 떨어지세요 "
" 싫은데 " 윤이 민을 더욱 세게 껴안았다.
" 당신 숨막혀요 " 윤은 아쉽다는 듯이 민에게 떨어졌다.
" 내가 거부해도 계속 이럴거죠? 안 한다고 해도 그쪽 생각대로 밀어붙일거죠? “
" 당연하지 “ 윤이 예의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내가 뭘 하면 되나요? 이렇게 만나면 되는 건가요? “
" 당신이 날 더 원하게 될 거야“ 윤이 말했다.
민은 윤의 얼굴을 마주보며 머릿속에서 붉은 경고등이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불가항력으로 윤이라는 소용돌이에 휩싸인 것을 깨달았다. 윤의 요구는 단순하고 강압적이었다. 윤이 민에게 준 핸드폰을 늘 휴대할 것, 민의 저녁시간은 윤에게 할애할 것 다행인건 윤은 그때 이후로 급작스런 스킨십은 시도하지 않았다. 살짝 민의 기대가 김 세는 듯한 기분이들었다. 그 후로 드라이브와 호텔 라운지에서 윤과 식사를 했고 늘 예의바른 행동에 집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주로 윤이 얘기를 하고 민은 들어주는 식이었다. 민이 그의 얘기가 재밌거나 마음이 활짝 열려 듣는 것이 아니라 그의 화법이 하고 싶은 말과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듣기를 원하는 이기적인 성격에 기인한 것이었다. 하긴 누가 그의 말을 가로막고 지 할 말을 하겠는가? 윤은 원래 집안이 부유한 사람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돈에 대한 감각과 사람을 부리는데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약혼녀와는 어린 시절 집안의 교류로 인해 남보다는 나은 사이나 여자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했다.
윤이 대단한 사람마냥 늘 부끄러워하는터에 약혼녀를 만날 때면 일부러 매너있게 대한다고 했다. 본모습과 비아냥거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무척 당황할것이라고 윤은 남의 일인것럼 얘기했다. 윤이라는 남자의 날것 같은 매력과 부유한 집안 배경이 합쳐져 그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러다가 민을 보게 되었고 민의 보스와의 묘한 기류를 눈치 챘고 넝마로 옷이 찢기면서 회사서 치도곤 당하는 걸 목격했다. 이후에 민의 소식을 수소문하다가 우연히 다시 만났던 것이다. 6개월 만에 다시 만난 여자는 또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견고해 보이기도 했다 자극제라고 폄하하면 호기심 그런 것을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만나면 편했고 윤의 비아냥거리는 성격도 물처럼 받아주었다. 민은 낮에는 식물처럼 지내다가 윤의 전화를 받을 때면 생기를 동반한 흥분이 느껴지는 것이 느껴졌다. 윤은 항상 건조하게 전화를 해서 장소만 말하고 대답유무와 관계없이 끊었다. 처음에는 정말 무례한 사람이야 라고 생각했다가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레스토랑 일을 빼고는 민을 정말 조심스레 대했다. 간간히 다정스런 웃음을 보여줬다. 그럴 때면 민은 가끔 설레기도 했다.
윤과 만나기로 한 이후 가장 오랜 시간 연락이 없는 기간이 딱 2주가 되었다. 돌출행동으로 저돌적인 만남을 강요한 게 매일이었는데 갑자기 뚝 연락이 끊겼다. 처음엔 그저 담담했다.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싫증이 난 것이니라. 그렇게 생각했다.
남자에 목을 매고 어리석게 구는 나라는 별종을 보면서 한 번 툭 하고 반응을 두고 보자 했는데 재미없다 하고 치우자 그런 생각일 것이다. 시간이 점점 지나자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외엔 넋을 놓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불안하다가 화가 나다가 마치 생리증후군과 비슷한 오락가락한 기분도 들었다. 계속 울리지도 않는 휴대폰을 들고 다니느라 신경이 바늘귀마냥 예민해지는 시기였다.
어느 일요일도 공상과 망상을 오가다가 겨우 잠들었는데 그날의 꿈을 꾸었다. 여러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욕을 먹고 맞아서 흰 블라우스가 뜯겨져 가슴이 훤히 보이는 꿈 부들부들 떠는 자신이 보인다. 치욕감을 몸을 떨며 어리석게도 눈물로 범벅이 되어 앞이 뿌옇게 보여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누군가 재킷을 어깨에 덮어주며 몸을 가려주었다. 눈물로 어룽진 눈으로 본 얼굴은 뿌옇게 윤곽이 보이지가 않는다. 민은 남자를 밀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그때 꿈의 시점으로 본 남자의 얼굴이 점점 또렷해진다.
붉은 입술 예의 그 비웃음이 걸린 입술 뚜렷한 얼굴 윤곽 그리고 그의 눈 윤이었다! 그의 눈은 연민과 분노가 가득찬 모든 감정이 뒤섞인 채로 민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민은 눈을 천천히 뜬다. 그리고 옷장 가장 안쪽으로 손을 뻗는다 꿈의 그 재킷이다 늘 그날의 유일한 도움이었던 그 사람을 생각하곤 했다. 사무실내에서 친근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을 때 가장 피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을 때 틈을 내준 사람실은 세부에서도 그 날의 얼굴에 대해서 궁금해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옷은 저주받은 날의 가장 선명한 상처 같은 옷이라 옷장 안 깊숙한 곳에 처박고 기억조차 하기 싫었던 옷이었다. 그런데 윤의 부재 후 이렇게 꿈을 통해서 그를 기억해 낸 것이다. 늘 헤어질 때 마다 나를 처음 본게 언제지? 하고 확인하듯 물어본 윤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윤은 민을 자신을 그 순간을 기억해 주길 재촉했던 것이었다. 옷을 꺼내 안쪽을 봤다 영문이니셜로 –yoon .kim-이라고 수놓은 것이 보였다.아 이다지도 우둔한 게 나였다니! 이상한 인연이지만 다시 본 그에게 언제나 거리를 두고 선을 넘어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다시 연락할 엄두도 안 나는데……. 딱 한 번 연락을 했다 민도 침묵으로 전했고 상대방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민은 무슨 나쁜 말이라도 들을까 먼저 종료 버튼을 눌렀다.
다음날 민은 윤의 비서를 통해 윤이 머물고 있는 곳에 찾아갔다 메타세콰이어길이 끝없이 펼쳐진 오후의 늦은 햇살이 숲에 그라데이션 되어 푸른 잎들이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숨을 크기 들이쉬니 맑고 사이다 같은 공기가 페로 가득 찼다. 콧속으로는 푸른 숲내음이 들어오니 마음이 가뿐해졌다. 거기에 비례해 윤에 대한 마음이 점점 커지고 부풀어졌다.
그 길 끝에 윤이 호수를 등지며 서 있었다. 민이 뒤에서 윤을 와락하고 끌어안았다. 놀란 윤이 뒤로 돌아봤다. 며칠만에 본 윤은 그 특유의 시니컬한 매력이 없어지고 몹시 지쳐보였다.
" 나 기억났어요 나 도와주려했던거 그날 ....“ 윤이 씁쓸한 얼굴로 민을 떼어놨다.
"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아. 나 결혼해 너를 계속 만나려면 또 그런 여자로 숨겨놔야 해 내말 이해가 가?
이 타이밍 못 맞추는 여자야! “민이 윤을 올려다보며
" 그날 고마웠어요 늦게 기억해 내서 미안해요 그리고 결혼하지 마! 당신 어차피 제멋대인 사람이잖아“
" 이제 맞먹네 반말은 언제부터야? “ 민이 윤의 멱살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 지금부터! "
윤이 웃으며 민에게 입맞춤 했다. 얼굴 가득 웃음을 가득 담아 민에게 몇 번이고 키스를 했다. 욕망으로 허기진 키스가 아니라 따뜻함이 동반된 존중의 키스였다. 민도 윤을 더욱 끌어당겼다. 발꿈치를 세워 입술 선에 세심한 입맞춤을 하다 혀로 윤의 입술을 살짝 스쳤다. 키스하다 윤의 동공이 커졌다 아이 같은 천진한 기쁨의 표정이다. 윤의 품안에서 아득한 정신의 어딘가에 노곤한 세부의 비치가 떠올랐다
해 지는 노을을 보며 공허함을 느끼며 했던, 중얼거림으로 자신에게 주술같이 되뇌던 혼잣말
" 내게 다시 사랑이 올까…….? "
상처받고 다시는 그런 감정은 다시 안 오리라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삶이란 아니러니하게도 다시 꿈꾸게 하였고 더 풍부한 행복감으로 바닥으로 치고 올라오게 해줬다.
민이 누군가의 부속된 삶을 거부하였을 때 마치 선물처럼 사라졌던 순간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