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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 안녕하세요 ..... 마감이 세번이나 늦어졌으며 이는 계약 파기로 이어지며 계약금 반환과 더불어 .....] 지은이 메일을 읽다 ‘읽지 않음’ 상태로 다시 바꿔 놓는다. 꺼진 핸드폰 전원을 켠다. 까만 화면이 빛을 뿜으며 켜진다. 문자와 부재중 통화 알림이 연이어 화면 상단에 소낙비처럼 뜬다. 지은이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움찔한다. 출판사 편집담당자가 보낸 독촉하는 내용의 한글자 한글자마다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채 흔드는 것만 같았다. ‘힘들면 관둬!’ 라고 말 하는 듯 하다. 결과물을 내지 못하니 자꾸 피하고 잠수를 타게 되었다. 오랫동안 책을 내고 싶었다. 출판사의 닫힌 문을 열면 그 문을 열기까지의 고생보다는 쉬울 줄 알았다. 기쁨에 취해 가족과 지인들에게 축하턱을 마구 쏘았다. 기쁨은 잠시, 늪 같은 끈적한 슬럼프에 시달릴 줄은 몰랐다. 그것은 지은에게서 생기를, 웃음을, 잠을 앗아갔다. 그 자리에 불안과 불면과 자기혐오가 대신 채워졌다. 처음 계약서를 싸인한 이후 넘겨줘야 했던 원고는 반년이 지나도록 못 쓰고 있다. 그녀가 괴로움에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했다. 계약금을 다시 뱉고 쉬면 될 터였다. 그렇다면 작가 문지은이 아니라 자연인 문지은으로 남아 평생을 괴로워하며 살게 뻔하다. 지은은 핸드폰 화면을 터치해 문자창을 연다. ‘담당자님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석달안에 원고 보내드릴게요 약속 꼭 지키겠습니다!’라고 보낸다. 그녀의 손가락에 가는 경련이 일었다. 이게 사서 고생이고 재능 없는 사람이 글을 사랑한 죄다. ‘미치겠다....’ 그녀에겐 확신 없이 끌고 나가는 미친 집착만이 존재하고 있다. 그 집착이 지은을 집어삼키기 전이다. 지은은 암막커튼을 치고 애벌레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침대로 파고들었다. "푹 자고 나면 나아 질거야 "읊조리면서.
늦은 오후, 무영은 신호대기를 받고 차를 세운다. 창밖을 바라보니 가로수 너머에 한 초등학교가 눈에 보인다. 하교하는 아이들의 행렬이 보인다. 자기 몸만한 가방을 등에 맨 채 귀여운 초등학생들이 재잘거리며 친구들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노오란 병아리 같은 귀여운 아이들이 노란 은행잎이 깔린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활기 찬 몸짓에 책가방이 경쾌하게 깡총깡총 흔들거린다. 시선이 멀리 한 방향으로 모아지더니 눈물이 잠시 맺힌다. 뿌연 시야 사이로 어느 날들이 떠오른다. 순간 신호등이 녹색에서 빨강으로 바뀌었다. 단정한 얼굴로 돌아온 무영은 이내 차를 출발 시킨다. 왼쪽으로 핸들을 꺾는다. 라디오에서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이적의 <걱정말아요 그대>가 흐르고 있다. 무영은 계속 운전을 하면서 가게자리를 찾았던 반년전을 떠올린다. 짧은 시간에 크고 무거운 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터져버렸다. 처음은 일에 대한 회의가 왔다. 아이들은 무척 귀여웠고 보람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지만, 누군가를 가르치기엔 해가 가면 갈수록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직생활이나, 점점 기대치를 늘여가는 부모님과 여자친구 혜원이 그의 가슴에 무거운 추를 달아주었다. 그 추가 무거워질수록 가슴이 옥죄졌다. 이게 아닌가 싶은데 억지로 끌고 갈 수 없었다. 어딘가에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을 길어 올릴 수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펄쩍 뛰며 미쳤다라고 말했다. 바로 안방에 들어가 머리에 흰 무명띠를 동여매고 누워 있었다. 교사가 된 무영은 누가 봐도 자랑스런 아들이었고, 그녀 인생에 큰 자랑이었으리라. 석고대죄하는 사극 속 죄인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의 인생을 살고 싶을 뿐 그게 어머니의 허락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에게 그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을 드리고 싶었다. 살면서 그렇게 의지를 가진 적이 없었을 것이다. 다음은 혜원이었다. 안정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담백한 이유에 그녀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말했다. 학교를 그만두면 헤어지자고 말했다. 분명 일과 그녀의 의미는 다르고 별개의 문제인데, 그녀는 무영이 교사직을 유지하는 일에 연인관계를 걸었다. 무영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에 대한 감정도 이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았다. 우정이었는지, 익숙함이었는지. 상대방에 대한 예의는 솔직함이고 아닌 걸 알면서도 이어가는 건 위선이었다. 결국 지지까지는 못 받았지만 어머니에겐 조건부 승낙을 받았다. 몇년만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말이다. 마지막 근무를 끝내고 무영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끝내 받지 않았다. 그만두겠다는 말 이후 교무실에서 그녀는 무영의 눈길을 애써 피했다. 단지 직업을 바꿀 뿐인데, 무영이 교사직을 내려놓는 순간 연인의 자리에서 해고당했다. 그녀의 그런 생각이 기가 막혔지만 어자피 같이 갈 인연이 아니라고 마음 정리를 했다. 한 시기가 끝나면서 그녀와의 관계가 그렇게 매듭지어졌다.
그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쳐 무영은 마음먹은 대로 일을 진행했다. 어떤 정해진 틀에서 나오면 잠시 당황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는 결코 당황스럽지 않았다. 모든 일을 온전히 자신이 지휘하는 자율성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가 기쁨을 길어 올릴 수 있는 일로 바를 정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틈틈이 칵테일을 공부하고 조주기능사 자격증까지 땄지만, 취미와 일의 영역은 엄연히 달랐다. 제대로 시작하고 싶었다. 우선 장소가 마음에 들어야 했다. 바는 번화가에 있어야 장사가 잘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반대로 하고 싶었다. 떠들썩한 분위기 말고 조용히 하루를 마감하고 느긋이 쉬었다 가는 곳. 자신이 퇴근길에 단골 바에 가서 멍하게 있었던 시간을 좋아했음을 기억해 냈다. 고독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이상하게 내일을 살 수 있는 에너지가 새로 나오는 듯 했다. 잠시 세상과 멀리 떨어져 아주 짧은 여행을 의식 저 너머 이리저리로 먼지처럼 부유하다가, 다시 현실로 자연스럽게 건너갈 수 있는 건널목 같은 곳.
무영이 좁은 언덕길을 오르고 있다. 저 멀리 낮은 건물 사이로 보름달이 달무리를 드리우며 휘영청 언덕배기 끝자락에 걸려 있다. 그가 양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를 액자 모양으로 해 거리 이곳저곳을 프레임 잡듯 본다. 그리고 거리의 처음부터 달이 걸려있는 언덕 너머까지 걸어갔다 다시 되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주변 가게들은 어떤 중류의 가게가 있는지를 살펴본다. 거리는 조용했다. 대학가 근처라 지하철과의 거리도 가까웠다. 바로 건너편은 왁자지껄한데 이곳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다음날 무영이 어제의 거리, 한 부동산 중개소를 들어간다. 며칠 후 무영이 냉장고 수리점 간판 아래에서 걸어 나온다. 내부를 보니 긴 바 테이블이며 조금씩 가게 형태를 갖춰가고 있다. 아직 진행 중이다. 곧 간판을 떼어내고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될 것이다. 밤과 어울리는 곳을 찾아 일부러 어두운 밤에 가게 자리를 알아보러 다녔다. 머릿속에 상상한 곳이 실제 있을 리 없지만 찾아보고 싶었다. 허무함과 따뜻한 분위기가 공존하는 실제의 장소. 무영이 이전에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밤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처음 접하는 순간 눈을 뗄 수 없었다. 거기에 무영이 서 있었다. 늘 혼자서 어딘가를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호퍼의 그림 속 등장인물들의 고독한 모습에서 그는 동질감을 느꼈다. 애초부터 그런 분위기를 가진 거리를 서울에서 찾는다는 게 망상이겠지만 왠지 있을 것만 같았다. 누구라도 걷다 불안해질 쯤 조금 쉬어갈 수 있는 곳, 밤의 품안에서 잠시 포근히 있다 가고 싶은 거리. 그 밤,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기운을 내뿜는 달에 그냥 꽃혔다. 여기가 좋겠다고 말이다. ‘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을 곳이라는 걸. 그리고 언젠가는 같이 밤을 기다릴 수 있는 인연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하며 가게를 만들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