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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이 멀리 벽시계 바라본다. 3시를 가르킨다. 이때쯤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올텐데 아직 그대로다. 무영이 바 테이블 멀리 그림 아래 며칠 채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를 바라본다. 무영이 노트북을 열어 이상한 여자 폴더를 클릭한다. 이상한 여자가 오지 않는다. 내가 말이 너무 심했다. 그렇게 쥐어짜듯이 글을 쓰는 여잔데.... 가볍게 말했다. 파르르 떨던 그녀의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라고 쓰고 있다. 그의 노트북 옆에는 다른 노트북이 가만히 자리 잡고 있다. 그녀가 오면 빌려주려고 챙겨온 것이다. 바 하부장 아래 제빙기에서 마침 ‘툭툭’ 각진 네모 얼음이 떨어지며,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낸다. 그의 머리에 그녀의 대한 미안함이 쌓일수록 얼음은 더 무심하게 떨어진다. ‘툭툭’과 ‘톡톡’ 그가 자판치는 소리와 함께 고요한 시간이 흘러간다. 툭툭톡톡 저 멀리 밤을 기다리는 사람들 속 여자의 모습이 웅크리고 앉았던 지은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그녀는 분명 상처 받았을 거다. 되짚어 보니 그런 그의 무신경함이 종종 그녀의 마음을 쿡쿡 찔렀던 거 같다.
“어떤 사람이 우물을 판다 가정해 봐요. 이 사람은 물이 나오리라는 확신에 대해 1도 의심이 없어요. 거의 종교와 같은 믿음이죠. 수맥을 찾아서 끝없이 삽질을 해요. 아무도 이 사람에게 관심이 없어요. 그러다가 그 사람이 하는 행동에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반응을 해요. 여기 말고 저기를 파봐라. 저쪽이 더 흙이 촉촉하지 않더냐? 어떤 이는 그런 말을 해요. 굴삭기와 기사를 고용해라. 간섭하려는 사람, 도와주려는 사람 많겠죠. 파는 당사자는 어땠을까요? 물이 나온다는 확신과 불안 사이에서 가장 괴롭겠죠. 그러다 어느 날 마지막으로 삽을 던지고 도망을 갈까? 말까? 고민을 해요. 이내 마음을 정하고 마지막 삽을 뜨는 순간. 흙이 촉촉해 지다 물이 나와요. 한 가닥 확신을 겨우 짜내 마지막 삽을 뜨는 순간 말예요. 그토록 원하던 물이 솟구치는 거에요. 이건 장난이에요! 신의 잔혹한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는. 신의 장난에 인간은 놀아나지만 알게 되죠. 그토록 물을 찾았던 자신의 확신에 대답하는 신의 사랑이라고 느끼죠. 부질없는 일에 매달린 게 아니라는 대답을 들은거죠”
지은이 식어버린 커피를 홀짝이며 무영을 담담히 바라본다.
“그렇게 힘들면서 왜 써요? 이 평범한 질문에 그녀는 고민과 의지를 녹여 말했었다. 그 날, 지은은 반짝이던 눈을 내리 깔고 빈 잔만 톡톡 건드렸다. 그녀의 손짓에는 이해 받고 싶어 하는 무안함과 안간힘이 묻어 있었다. 무영은 그 순간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고 싶었다. 자신도 쉽게 교사직을 내려놓지 못해 고민했으면서,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대신 연타로 헤집어 놓았다. 포기는 쉽다. 그러나 그 길은 길고 멀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왜 진심으로 그녀를 위로하지 못했는지. 늘 남자들은 이렇게 잘못된 위로를 한다. 여자들이 원하는 건 해결이 아닌 그냥 입 다물고 들어주는 것임을.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상한 여자’ 폴더의 글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에 띄게 많이 쌓였다. 무영은 그 이상한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다. 혜원이 들어서고 있다. 무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테이블 뒤로 걸어가 의자를 빼준다. 혜원이 코트를 벗고 자리에 앉는다. 그녀가 바 내부를 살피듯 두리번거린다.
“좋네....”
무영이 마가리타를 내민다. 유선형 유리잔에 라임물결이 잠시 출렁인다. 둥근 테두리에 소금가루가 섬세하게 묻어있다. 그녀가 나온 마가리타 테두리에 묻힌 소금에 살짝 입술을 가져다 댄다.
“눈물처럼 짜네.... 알고 마시라는 거야? 마가리타... 사랑의 실패잖아....”
무영이 괜스레 천장에서 유리잔을 꺼내 천천히 닦는다.
“나 설득하려고 온 거 아니야... 너 사표 수리 됐어 그 말 해주려고. 니가 쓴 블로그 읽어봤어 그 거 읽고 딱 포기가 되더라. 너 여기가 교실보다 잘 어울려”
무영이 그녀를 담담히 바라본다.
“나 너... 힘든 거 알고 있었어.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좋은 선생님이 되려는 목표로 버티기엔 힘들어 하는 거. 내게 무언가 허락을 구하려던 니 모습... 알고 있었어. 그런데 너 놓치기 싫었어. 네가 있었기에 임용 통과할 수 있었어 그냥 끝까지 같이 가고 싶었어.....뭐 꼭 연인이 아니라도 동료라도 나는 이 일이 좋고 자부심이고 그랬는데 너는 아니었다는 거 인정하기 싫었어.... 진짜 싫었는데.... 결국 여기 왔어”
“고맙다....”
무영이 무언가 더 말을 하려는데 마침 두세명의 사람들이 가게에 들어선다.
“잠깐만....”
그가 주문을 받고 자리에 돌아온다.
혜원이 가볍게 웃으며
“신경 쓰지마. 이것만 마시고 갈게. 무영아 니 노트북 좀 써도 돼? 이메일 확인 할게 있어서”
“응”무영이 노트북을 들어 테이블에 올려 준다. 혜원이 메일을 확인하고 노트북을 닫으려다 하단 창을 클릭한다. ‘이상한 여자.....? 이게 뭐야’ 무영은 와인을 찾으러 창고에 갔다. 혜원이 창고 문을 바라보면서 무영이 쓴 글을 읽고 있다. 혜원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또렷해진다. 몇 개의 글을 빨리 훑어보고 그녀가 조용히 노트북을 닫는다. 빈잔 테두리에 그녀의 마음처럼 소금가루가 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사람들은 술에 취하고 혜원은 그녀의 인생에서 어떤 것들이 스쳐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무영은 이제 그녀에게 닿지 않는다. 혜원이 무영이 돌아오기전에 출입문을 열고 나간다. 혜원이 밖에서 유리창 너머 무영을 바라보고 있다.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그녀의 얼굴에 짧은 순간 여러 가지 표정이 교차되어 지나간다. 안타까워보였다가 체념하다가 쓸쓸해 하다가. 저 멀리 지은이 걸어오고 있다. 그녀가 출입문 앞 혜원을 의아하게 바라본다.
“저기요”
문을 열려는데 혜원이 그녀를 부른다.
“네....? 저요?”
“그쪽 맞죠? 이상한 여자”
“예? 누구시죠......?”
두 여자가 네온사인 아래에서 어색하게 마주 선다. 긴장이 감도는 그녀들과 다르게 무영은 바쁨속에서 그녀들이 서있는 모습을 못 본다. 지은이 방에 들어와 후 하고 한숨을 쉰다. 외투를 천천히 벗고 옷장에 걸어둔다. 아까 만난 혜원의 얘기를 듣고 바로 집에 들어 왔다. 무영에게 사과를 하러 가는 길이었으나 차마 가지 못했다. 그들이 일반적인 손님과 사장 관계보다는 가깝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그의 과거 직업은 전혀 예상외였다. 늘 자유분방하고 가끔은 차갑던 무영이 선생님이었다니 같은 사람이란게 믿기지 않았다. 자신에 대해 글을 쓴다는 거에 대해서 혼란을 느꼈다. 가서 사과하고 예전처럼 지내리라. 그와 시덥잖은 농담을 하고 졸기도 하고 될 거 같은데..... 무영이 자신을 신경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렇게 잔뜩 엉켜있는 머릿속으로 그를 볼 자신이 없었다. 혜원이 한 마지막 말이 더욱이 그녀를 망설이게 만든다. 자신이 무영의 예전 여자친구였노라고. 다시 시작하고자 찾아갔던 거였다고 말이다. 그러나 우연히 무영의 관심이 다른 사람에게도 흘러간 걸 알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눈빛은 담담했지만, 지은에게 어떤 대답을 요구하는 듯 했다. 그게 가장 마음에 걸린 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