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무영이 달력을 넘긴다. 10월 11월 12월 벌써 한해의 끝자락이다. 창고에서 크리스마스 용품을 담은 상자를 가져 온다. 그가 크리스마스 니스를 출입문에 매달아 놓는다. 테이블위에 스노우 볼을 놓아둔다. 눈꽃 모양 가랜드를 가게 뒤쪽 벽 아래로 길게 늘여 뜨린다. 각 테이블 위 스탠드 옆에 캔들 홀더를 올려 둔다. 며칠 전 첫 눈이 내린 날, 무영은 택배로 책을 받았다. 바로 선인장에 기댄 하루라는 책이었다. 그의 독설로 작정하고 썼는지 결국 지은이 책을 완성해 보냈다. 며칠은 복잡한 마음에 쉽사리 책을 펼쳐 보지 못했다. 오늘은 몇 장 안 남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볼 생각이다. 책을 다 읽고 덮을 쯤, 그녀가 나타날 것만 같다. 뜬금없이 왔다 사라진 그녀. 지은이 무슨 마음으로 책을 보낸 건지 무영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연락처도 몰랐기에 그녀와의 끈은 그 어디에도 없다. 지은에게 심한 말을 한 이후 미안했고 발길을 뚝 끊는 그녀에게 화가 났다가 감정이 시간에 따라 그렇게 변화 했다. 지금은 그저 그녀가 보고 싶을 뿐이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그의 삶의 한부분이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 한 시기에 지은이 그에게 스며들었고 혜원은 지나갔다. 그녀와는 어쩌면 결혼까지 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학생부터 그 힘들다는 임용까지 그녀는 동료였고 연인이었다. 그도 혜원을 많이 의지했었고 늘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이라 여겼다. 어렵사리 꺼낸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말에 가장 분노하고 매섭게 자신을 몰아쳤던 사람이 부모님보다 혜원이었다. 혜원이 바에 다녀간 후 며칠 후에 가게 출입문 밑에 쪽지를 발견했다. 지은이었다. 노트북을 고쳤고, 다시 쓰겠다고 그동안 고마웠다고라고 간단하게 쓰여 있었다. 언제 방문하겠다는 말도, 그날 일에 대한 언급 또한 없었다.
그 날 무영의 시작과 마지막은 늘 그랬듯이 한결 같았다. 일을 하는 무영은 모습은 평상시와 같았지만, 그는 출입문이 열릴 때 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는 이가 있다는 듯이. 연말이라 소소하고 조용히 2~3명씩 방문하는 사람들과 조용히 한 잔 마시는 사람들이 오갔다. 딱 무영이 감당할 수 있고, 서브 할 수 있는 정도의 주문량이었다. 새벽 5시 반 어느새 끝날 시간이다. 무영이 남은 설거지들을 정리하고 개수대 옆에 앞치마를 벗어 잘 개어 놓고는 창고에서 가져온 새 양주병을 가져와 이단 선반위의 올려 놓는다. 그러나 몇달간 앱솔루트 보드카는 그대로였다. 지은이 남긴 술이기 때문이다. 버리지 않은 건 왜였을까? 그 병을 치워버리면 다시는 그녀를 보지 못하기 때문일까. 다시 올까하는 생각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으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녀의 신호같이 느껴졌다. ‘우린 서로를 모르잖아요 그저 같이 밤을 기다렸을 뿐.’라고 말이다. 책은 지은과 꼭 닮았다. 선인장에 기댄 하루라는 책은 메마른 슬픔, 혼자 아파하다 못해 가시로 누군가를 거부하는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였다. 선인장 위로 바람이 부는지, 비가 오는지, 지나가는 누군가가 선인장에게 시선을 주는지 그런 관심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주인공은 그렇게 자신밖에 못보는 존재였다. 우리가 계속 이 공간에서 밤을 기다렸더라도 그와 그녀의 결말은 똑같았을 거다. 그녀에게 향한 관심이 그냥 수그러 들었을 수도, 더 발전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는 만약이라든가 혹은 이라는 말처럼 신기루고 흩날리는 헛된 마음의 침전물이다.
얼마 후면 연말이 신년으로 바뀐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불행에서 행복으로 오늘에서 내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극적인 변화를 바라며 이번 해와 다음 해를 관성처럼 넘어갈 것이다. (그도 별다르지 않는 사람들 속의 한 사람이다.) 오늘의 끝은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거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무영은 성큼 걸어가 출입문으로 간다. 손을 뻗어 클로즈 싸인 보드를 돌린다. 그가 지은이 남긴 보드카 병을 들고 그림 아래 테이블로 앉는다. 샷잔으로 보드카를 따른다. 무영은 천천히 마신다. 그리고 담배를 한 개 꺼내 불을 붙인다. 불은 잠시 반짝이다 사라진다. 무영이 어둠속에서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담배를 핀다. 이 공간에서 담배를 핀 건 처음이다. 몇 시간 후 새해로 시간이동을 할테니 그전까지만 누군가에 대한 미련안에 기대고 싶다라고 무영은 생각했다. 담배향이 느린 춤을 추듯 금새 피어오른다. 밤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림 속 여자가 공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눈앞에 하얀 담배 연기가 환영처럼 흩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