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unji Jan 04. 2021

낙타의 삶, 사자의 삶, 아이의 삶,

나는 어디쯤에 있는가. 

니체는 인간 정신의 발전 단계를 3가지로 정의내렸다. 

낙타의 삶, 사자의 삶, 그리고 아이의 삶. 


낙타의 삶은 나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채 사회가 정해놓은 틀안에서 낙타처럼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낙타의 삶은 고달프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사막을 건너지만, 정작 왜 사막을 건너야 하는지 알지 못한채 하루하루를 견뎌낸다. 니체는 대부분의 인간이 낙타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삶을 마감한다고 이야기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회사를 다닐 때 10년 후 20년 후 나의 모습이 너무 빤하게 그려진다는 것이 무서웠다. 나는 건실한 낙타의 삶을 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졌지만, 내가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뿌듯함에 내 발로 무리에서 이탈하기 까지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소수의 사람들은 낙타의 시기를 지나 사자의 시기로 진화해나간다. 사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 기존의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타인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의 욕망을 욕망하기 시작한다.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찾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성취한다. 성취하지 못한다면 그 원인을 찾아 다시 도전한다.  한 때 나도 사자의 삶을 욕망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하게 된다면, 행복과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실천에 옮겼다. 사자의 삶은 낙타의 삶과 비교하면 훨씬 더 진일보한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끝인걸까?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은 결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다. 사자는 기존의 체계에 대항해서 투쟁한다. 아니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 누구보다 큰 에고를 쌓는다. 에고를 가진 자는 '내가 옳다'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사자의 단계에서 빠지기 쉬운 착각은 사자의 단계가 곧 종착지라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사자의 단계는 그 누구도 쉽게 이룰 수 없다. 그렇기에 사자의 에고는 결국 내가 옳다라는 함정에 빠지기도 쉽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낙타의 단계와 사자의 단계는 큰 차이가 있지만,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점에서는 결국 같은 차원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나 자신의 욕망을 욕망하는 삶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보다는 진일보 했지만, 결국 욕망의 채워지지 않음에 고통받을 수 밖에 없고, 끊임없이 투쟁하며 싸워나갈 수 밖에는 없다. 


결국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정신의 최종 종착지는 아이의 단계이다. 사자는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두꺼운 에고를 벗어던진다. 아이의 단계에서는 그 무엇도 욕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저 현재에 존재하는 것, 이 순간의 나의 경험만이 중요하다. 그야말로 현재를 즐기는 단계이다. 낙타가 과거를 살았고, 사자가 미래를 살았다면, 아이는 오직 현재에 존재한다. 아이는 쓸데없는 개념의 무덤에 자신을 빠트리지 않는다. 기쁨을 스스로 정의한 후 기쁨을 성취하려고 하는 것이 사자의 단계라면, 아이는 그저 기쁨을 느낀다. 행복을 느낀다. 사랑을 느낀다. 굳이 무엇을 개념화하고 정의할 필요가 없다. 무언가를 개념화 하는 순간, 그 실제는 사라져 버린다. 여기 사랑하는 두 연인이 있다. 이 연인이 하고 있는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을 개념화하여 정의 할 수 있을까? 60억 인구는 모두 다르고 그들이 느끼는 사랑의 감정은 모두 다르다. 무엇을 개념화 하여 정의한다는 것은, 실제를 왜곡하고 갇히게 만들어 버린다. 언어와 개념화는 인간이 만들어낸 최대의 발명품이지만, 그 덕분에 인간은 개념화의 굴레에 빠져서 진정한 실체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아이는 모든 것을 알지만,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 


원하지 않는 것, 욕망하지 않는 것은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쉽게 가질 수 있도록 해준다.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고 순간에 충실할 때,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찾아간다. 이건 마치 노자의 도덕경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해보게 된다. 노자를 공부하면서 노자가 추구한 것은 결코 자연으로 돌아가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무위자연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도덕경은 군주가 나라를 어떻게 통치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다만 그 방법론이 무언가를 정의하고 추구하는 방식이 아니라, 개념화 하지 않고 그 실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임으로 마치 자연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이루어나가듯, 그렇게 삶에서의 뜻을 이루어 나가라는 것이다. 아이의 삶도 그런 것이 아닐까?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지만, 역설적으로는 너무나 쉽게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삶. (내가 써놓고도 뭐라고 하는 건지 참 어렵네..) 


나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확실한 건 아이의 단계는 아직 나에게는 머나 먼 길이라는 점이다. 타인의 욕망을 구분해 낼 수 있는 힘은 생겼지만, 아직도 종종 책임감과 부채감에 남의 욕망을 위해 열심히 노오력 하곤 한다. 내가 싫어하는 일을 해야 할 때에는 괴롭고 짜증이 난다.  호/불효가 생기는 것은 결국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은 욕망, 싫어하는 건 하기 싫은 욕망, 내 맘대로 살고 싶은 욕망. 진짜 자유는 그 욕망에서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 


낙타의 단계에서 사자의 단계로의 변화가 유충에서 에벌레로의 변화라면, 사자의 단계에서 아이의 단계로의 변화는 에벌레가 나비가 되는 변혁이다. 낙타의 단계에서 사자의 단계로 옮겨가는 방법은 이제 좀 알겠는데, 사자의 단계에서 아이의 단계로 옮겨가는 그 변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명상을 하면 그 변혁을 이룰 수 있다고 이야기 하는데, 아직 나의 수행이 짧아서 그런지 아이의 단계로의 변혁은 요원해 보이기만 하다. 히유 어렵구만... 

작가의 이전글 2020년 연말정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