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이제야 아주 조오오금 이해되기 시작하네. ..
니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건 꽤 오래전 일이다. 사실 니체를 읽으면 좀 있어보일 것 같다는 허세스러운 마음으로 니체를 읽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왠걸. 니체가 하는 말은 단 하나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영원회귀는 무엇이며, 초인은 무엇이며, 신은 죽었다니 그 또한 무슨 말이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사놓고, 밤마다 읽었지만, 몇 페이지를 읽다가 잠들어 버리는 것을 수 없이 반복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미쳐버린 불행한 철학자를 공부할 필요는 없지, 그 시간에 행복하게 살다죽은 사람들에 대해 공부하는게 훨씬 바람직한일이야. 그렇게 20대의 나는 니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니체를 처음 알았던 10여년 전, 나는 이 세상에 불변하는 영원불멸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종교를 공부했고, 절대적인 선을 이룰 수 있는 일들 (더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절대적인 선을 이룰 수 있다고 그 당시의 내가 믿었던 일들) 이를테면 NGO에서 일한다던가, 혹은 사회적 기업을 만든다던가 하는 것들에 관심을 가졌다. 절대적인 가치를 이루면서 삶을 살아간다면 인생이 허무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좌절이 찾아왔다.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곳들의 대부분은 그 절대적인 신념의 한쪽면에 포장된 거짓과 위선, 모순을 끌어안고 '나만 옳다'의 함정에 빠져있었다. 오로지 나만 옳은 것, 그래서 나와 다른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 이를 과연 절대적인 진리, 절대적인 선이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을 죽였다. 그리고 신을 대신할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니체의 말에 의하면 결국 신을 죽인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은 스스로 신이 되는 것이다.
니체가 이야기 한 '신은 죽었다'의 의미를 이제야 어렴풋이 이해하겠다. 절대적인 무언가가 존재하는 한 인간은 절대 주인으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이 인간으로써의 온전한 자유인, 온전한 창조자로써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그가 해야하는 가장 첫 번째 일은 신을 죽이는 것이다. 그 때 인간은 비로소 해방되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나갈 수 있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알을 깨고 나가 만나야 했던 새로운 세계도 신이 죽은 세계 였다. 모든 것이 선과 악으로 대립된 세계에서,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인도를 여행할 때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전 세계의 종교의 99%는 결국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사막에서 탄생한 것과 인도에서 탄생한 것. 생각해보니 그렇다. 재미있는 것은 사막에서 탄생한 종교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천주교, 조로아스터교 등은 모두 유일신을 믿는다. 반면 인도에서 탄생한 종교들,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등은 유일신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의 수행과 해탈을 강조한다. 사막은 시시각각 변화한다. 아침에 자고 그 다음날 일어나면 모양이 변해있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이러한 변화속에 어떻게서든 살아남아야 하는 것은 사막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숙명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을 찾게 된다. 내가 마주하는 모든 것은 계속 변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변화하지 않는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신을 죽였다.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신의 죽음은 곧 허무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목표가 사라졌을 때, 혹은 그토록 원하던 목표를 이루었는데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허무함을 느낀다. 니체는 신이 죽은 이 세계에서 허무감에 빠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끔 도와주는 두 가지 개념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바로 영원회귀와 초인 사상이다.
사실 영원회귀는 정말 이해되지 않는 개념이었다. 인간은 영원히 환생한다. 그리고 1분 1초도 다르지 않은 똑같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처음 이 개념을 접했을 때에는 어처구니가 없게 느껴졌다. 아니, 무슨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가 있어? 환생을 하는데 어떻게 1분 1초도 다르지 않게 살 수 있는 거지? 나는 지금도 내가 1초 후 무엇을 할 지 변경할 수 있다고. 그런데 이런 나의 지금 생각들까지 조정해서 1분 1초도 다르지 않게 살 수 있다고? 말도 안되!! 라고.... 생각하며 이 개념 자체를 거부햇다. 그런데 지금 이 사상을 돌아보니, 니체는 영원회귀 사상을 통해 인간이 죽으면 이렇게 될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영원히 토씨하나 다르지 않는 삶이 반복된다는 가정을 통해 인간이 삶을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준 것이었다. 영원히 회귀한다는 것에서 우리는 프로메테우스를 떠올린다. 영원한 고통을 짊어져야 하는 삶. 하지만, 영원히 같은 삶으로 돌아와서 똑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한다는 것과 같다. 수 많은 세월을 환생해도 영원히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 그렇다면 환생은 의미가 없어진다. 다만, 지금 이 순간 내가 억만겁의 세월을 똑같이 살아갈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그래서 나는 이 삶을 영원히 똑같이 살게 된다면, 지금 나의 선택은 무엇인가?' 영원의 개념을 통해 결국 전달되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이다. 스티브 잡스의 유명한 연설에서 그는 '여러분의 삶이 3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요?' 라는 질문을 던졌다. 나 역시 그 때 연설을 들으며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니체는 죽음이 아닌 영원한 삶을 가져와 더 무시무시한 질문을 던진다. '네가 지금 선택하는 삶을 너는 영원히 동일하게 반복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너는 어떠한 선택을 하겠는가?" 라고 말이다. 즉, 이 영원회귀의 개념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절대적인 권력에 의지하는 종속적인 삶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필요한 개념이 바로 초인이다. 초인이란 니체가 이야기 하는 이상적인 인간이다. 초인은 영원히 반복되는 영원회귀의 세계관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성을 유지하며 영원히 반복되어도 긍정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인물의 원형이다. 초인에게 있어서 현재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이 삶이 영원히 펼쳐진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영원히 반복되는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지금 나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초인은 한 번 그 경지에 다다르면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지속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초인은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완벽한 존재는 자기자신을 넘어설 수 없다. 오직 불완전한 존재만이 스스로를 끊임없이 넘어서며 건너갈 수 있는 것이다.
니체를 공부하다보니 나의 삶을 좀 더 치열하게 돌아보게 된다.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지금의 삶과 똑같은 모습으로 영원히 반복되어도 기꺼이 긍정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죽음을 가정한 질문보다, 영원을 가정한 질문이 더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