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건강을 찾아서
작년 10월.
회사로부터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하라는 지시를 받고, CCO(Chief Creative Officer)라는 역할을 맡았을 때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이름은 '만성 소화불량'.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친구는 나의 에너지를 다 빨아가는 극강의 E였다.
회사원이 되고 나서 아침식사는 거리가 먼 존재였기에 매번 공복으로 출근했다. 현대인의 필수품인 아메리카노로 공복을 채우고 나면 그제야 혈색이 돈다.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신호다. 그렇게 공복으로 점심시간까지 버텨도 속에는 뭔가 단단한 이물질이 낀 것처럼 불편했다.
급기야 가만히 있어도 구토 증상과 어지러움이 느껴져 병원으로 향했다. 내과에서 약을 처방받고 살기 위해 악착같이 약을 먹었다. 하지만 만성 소화불량 친구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두 달을 동거하다 프로젝트 론칭과 함께 친구는 내 곁을 떠났다. 살 것 같았다.
하지만 올해 3월, 작년에 왔던 각설이, 가 아닌 만성 소화불량 친구는 따뜻한 봄과 함께 찾아왔다. 생명의 봄이라 식욕은 도는데 먹은 음식은 소화되지 않고 쌓여만 갔다. 회사에서는 많은 일이 있었다. 글에서 여러 번 언급했지만, 장기간 임금체불 이에 따른 동료들의 퇴사, 프로젝트에 대한 미련, 두터워져 가는 인간증오, 무기력...
그렇게 5월 초, 퇴사를 결심했지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만성 소화불량을 끈끈하게 잡고 있었다. 음식섭취가 거의 없었지만 한번 먹으면 속에서는 울렁거림과 메스꺼움이 콜라보를 이뤄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5월 말 계획한 베트남 여행에서 식비는 거의 0에 수렴할 거는 슬픈 예감과 함께 퇴사 직후 인천공항에 가는 날이 다가왔다.
'공항 가기 전에, 최대한, 먹지 않고, 소화제는, 넉넉히'
소화불량 친구는 여행까지 따라가겠다며 붙어있었지만 소화제의 힘을 믿으며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리고 2주 간의 베트남 여행이 끝나고 깨달았다.
'나 소화불량 있었지?'
그렇다고 하기엔, 베트남에서 먹은 수많은 쌀국수와 분짜, 반미, 꼬치, 맥주, 과자, 아이스크림, 케이크, 과일... 소화불량은 전생 일이었던 것처럼 베트남에 발을 딛자마자 사라져 있었다. 딱 한번, 여행 도중 갑자기 퇴사자인 내가 새로운 업무방에 초대되어 화가 치밀어 올랐을 때 빼고는.
그렇게 '퇴사는 만병통치약이다'라는 가설이 진실로 밝혀졌다.
오늘, OECD 국가 중 우리나라의 워라밸 수준이 최하위라는 연구 결과를 접했다. 나의 경우 오전 6시에 헬스를 하고 야근이 없는 날에는 친구와 만나 술로 목을 축이고 영어공부, 독서 등 자기 계발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게 다 기억이 미화된 탓이겠지. 몇몇 회사는 직원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 아직까지도 열정페이를 요구하기도 한다. 잔업과 야근이 당연하다는 듯이, 정해진 점심시간에 밥을 먹지 못하면 되는 시간에 먹으면 되지 않냐는 식으로 말이다.
워라밸 따위는 중요하지 않고, 직장에서의 성과와 나의 성취감이 중요했을 때가 있다. 하지만 건강과 개인 시간을 잃어보니 회사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하는 건 규칙적인 수면패턴, 책상에서 급하게 처리하는 식사가 아닌 온기가 가득한 식사 그리고 업무와 동떨어진 취미생활시간. 일이 자아실현의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일이 우리를 집어삼키게 내버려 두면 자아실현의 소망도, 건강도 보잘것 없어진다.
그러니 만성 소화불량 친구야,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