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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yla Y Oct 16. 2020

안녕, 런던. (2)

아마도... 신사의 나라?

  그는 무언가 말하려는 입모양을 한 채로 아주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마치 프레젠테이션이라도 발표하는 것 같은 말투로 말했다.



“교통비가 없는데 좀 빌려줄래?”


“What?”



  나는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은 마음에 더해 너무 어이가 없었던 나머지 Excuse me라고 할 정신도 없이 What?이라고 되물었고, 남자는 무어라 더 말할 듯 말 듯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아냐, 신경 쓰지 마.”하고는 어딘가 처량한 뒷모습을 하고는 멀어졌다.  진짜 구걸하는 건가, 아니면 신종 삥 뜯기인가, 뭐지......? 나는 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한 상황에 눈도 깜빡이지 못하는 상태로 한참을 일시 정지된 채 있었다.


 겨우 시선을 거두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앉은 젊은 백인 여자 둘이 사라진 남자 쪽을 보며 기가 차다는 듯이 웃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어색한 미소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이 상황이 웃기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나도 가볍게 목례하고 픽- 하니 웃어버렸다.


  나는 그 길로 주섬주섬 짐을 챙겨 그곳을 빠져나왔다. 딱히 별 일은 아니었지만, 괜히 순간적으로 긴장을 했는지 갑자기 피로해진 탓이었다. 아직 점심시간이 채 되지 않은 시각이었고, 날씨는 여전히 맑았다.



  호텔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러 길을 걷는데 전방에 정말 많은 비둘기 떼가 자리하고 있었다. 국적을 막론하고 비둘기가 너무 싫었던 나는 오만상을 쓰며 최대한 그들을 자극하지 않으려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으나,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비둘기들이 한 시에 날아올랐다. 내적 비명을 지른 후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이번에는 약간 돌아가는데, 다시 두 번째 푸드덕하며 한 무리의 비둘기들이 힘찬 날갯짓을 하는 것이다. 연속 두 번의 비둘기 어택을 받으며 이번에는 소리를 좀 내어 짜증을 냈다.


  그때 내 옆으로는 개를 산책시키러 나온 남자가 나란히 걷고 있었는데, 내 모습이 웃겼는지 그는 웃음을 참아보려고 하지도 않은 채로 “Double.”하고 유유히 사라지더라. 나는 이 동네 남자들 참 웃기다는 생각을 하며 옷을 탁 털어내었다.








  체크인 후 들어선 방은 아담하고 나름 깔끔했다. 싱글 사이즈 침대와 컬리지 건물이 정면으로 보이는 유리창, 그리고 화장실이 딸린 방이었다. 옛 건물을 개조하여 만든 숙소답게 딱히 히터 외에는 난방 기구가 없어 으스스했지만, 5일 정도 머물기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나는 옷가지와 짐들을 대강 풀어놓고 앞으로의 동선들을 대강 그려보기로 했다. 애초부터 빡빡한 일정의 관광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고, 꼭 가봐야지 하는 몇 군데만 메인 spot으로 잡았다. 오늘은 웨스트 민스터, 내일은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과 베이커 스트릿을 들렀다가 블룸즈버리로, 모레는 신시가지를 잠시 들렀다가 테이트 모던과 워털루역, 나흘 째는 근처를 돌아다니며 대영박물관이나 한 번 갔다가 쉬고, 마지막 날에는 킹스크로스 역 쪽으로 쭉 걸어가 봐야지. 음식은 딱히 먹어보고 싶은 것은 없고, 중간중간 와사비나 PRET A MANGER에서 간단히 해결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때마침 영국으로 유학을 오거나 일을 하고 있는 대학 동기 두 명과 연락이 닿았는데, 한 명은 내일 블룸즈베리에서, 다른 한 명은 모레 워털루역에서 잠깐 만나기로 했다. 한국에서 크게 왕래를 하는 사이는 아니었는데, 오히려 외국 땅에서 그냥 그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반가워 만나게 되는 인연이 조금 신기했다. 어쩐지 거나하게 세워둔 계획은 없지만 나름 알찬 여행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계획 아닌 계획을 세워놓고 나는 다시 간단한 짐을 꾸려 방을 나섰다.








  피카딜리 서커스 역에서 하차 후 웨스트민스터 역을 향해 걸었다. 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익숙하던 풍경이 눈앞으로 차차 다가왔다. 런던 아이와 빅벤, 버킹엄 궁전과 성당. 런던, 아니 영국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많은 랜드마크들이 모여있는 중심지에 내가 서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각양각색의 관광객들이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다들 한 껏 들뜬 표정이었다. 여행자의 표정들. 나도 그 틈에 껴서 낯선 동시에 익숙하기 그지없는 이곳저곳을 화각에 넣고 있었다.



“음, 저기....... Hello!”



  누군가 내 어깨를 살짝 톡톡 치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 젊은 커플이 활짝 만개한 미소로 내쪽을 바라보며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신혼여행을 온 참이라고 했다. 템즈 강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그들은 나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줄 것을 부탁했고, 나는 흔쾌히 알았다 하고 카메라를 받아 들어 최대한 열심히 구도를 잡아 사진을 찍었다.



“혼자 온 거야? 우리도 한 장 찍어줄게!”


“나는 괜찮아. 결혼 축하해, 즐거운 허니문 보내.”


“고마워. Ciao!”



  그들은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어 준 답례로 내 사진도 한 장 찍어주겠다 했지만, 나는 괜찮다며 사양했다. 철저한 1인칭의 기록을 남기고 싶은 이유에서였다. 나는 그저 그들에게 간단히 미소 지어 인사를 하고, 웨스트민스터 브릿지를 찬찬히 거닐었다.



  템즈 강은 놀랍도록 흙먼지가 가득한 색이었고, 바람이 너무 많이 부는 탓에 머리가 날려 앞을 보기가 힘들었다. 인간이 이룬 멋들어진 건축물들에 비해 런던 그대로의 자연은 인조적인 것들에 의해 많은 빛을 잃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찬란한 문명 가운데 여전히 강물은 흐르고 있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해가 짧았다. 이제야 겨우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는데도 어둑어둑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갑자기 날이 흐려진 탓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끝내 비는 오지 않았다. 이때 즈음의 비바람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워 우산을 쓰느니 못하게 사방에서 불어닥친다고 했다. 그래서 잦은 비에도 우산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오히려 보기 어려웠다. 2-3단 우산은 바람에 꺾여 곧잘 고장이 나기 때문에 굳이 추천하지 않는다는 말에, 나도 거추장스러운 우산 대신 널찍한 스카프나 한 장 목에 두르고 나온 참이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석양이 내린 자리로 완전히 어둠이 깔릴 즈음, 나는 다시 러셀 스퀘어로 돌아왔다. 숙소 근처에 Tesco가 있길래 들어오는 길에 샌드위치와 잘게 조각난 과일 팩을 하나 샀다. 딱히 맛은 없었지만 간단히 요기하기에는 적당했다.


  이미 밖은 어두워졌지만 창 너머로 비치는 건너편 컬리지 건물에는 아직 군데군데 불이 켜져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여행과 영감의 땅이, 또 누군가에게는 생존을 위한 일터라는 생각에 많은 감상이 머리를 스쳤다. 며칠 후면 돌아갈 내 나라도 그러하겠지.



  화장을 지운 후 샤워를 마치고 들어선 방은 겨울의 냉기를 그대로 머금은 듯 싸늘했다. 나는 추위에 호들갑을 떨며 얼른 이불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아직 차가운 이불에 파묻혀 오들 거린 한참 후에야 겨우 조금씩 온기가 돌았다. 생각해보니 거의 이틀 만에 침대에 몸을 눕히는 셈이었다. 이 생각이 드니 갑자기 손끝과 발끝까지 뻐근한 피로의 무게가 슬금슬금 퍼지는 느낌이었다.


  메모장을 펼쳐 놓고, 오늘 찍은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조금 더 이 여행의 감각을 즐기고 싶었지만, 눈을 깜빡일 때마다 더해지는 눈꺼풀의 무게에 못 이겨 결국 그대로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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