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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yla Y Oct 16. 2020

안녕, 런던. (1)

첫 조우

  “Ladies and gentlemen, this is your captain speaking...”


  택싱 직전 주임 기장의 방송이 흘러나왔다. 진정한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보편적인 외국 항공사 기장의 방송답게 유쾌한 말들로 이어지던 그의 목소리는 “Crews, take your seat.”라는 간결하고도 카리스마 넘치는 한마디로 마무리되었다. 그 오더에 승무원들은 모두 점프싯에 착석하였고 비행기는 이내 이륙 준비를 했다. 나는 비상구 좌석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아 이미 새벽이 차분히 내려앉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또렷하던 공항의 불빛들은 이륙 직전 속력을 높인 기체를 따라오지 못한 채 아득히 멀어졌다. 몸이 떠오르는 느낌과 함께 긴 여행이 시작됐다. 이 비행기는 약 11시간 후에 암스테르담에 도착할 것이다.



  나는 담요를 꺼내 조심스럽게 발끝까지 덮고 눈을 감았다. 기내식은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여행을 며칠 앞두고 먹었던 타코가 얹혀 지독하게 체했던 탓이었다. 속이 메슥거리고, 더부룩한 느낌으로 괴로운 머릿속은 여행의 설렘보다는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쉴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고민이 우스울 정도로 어찌나 깊이 잠에 들었던지, 기체가 착륙을 준비한다는 방송을 듣고야 눈을 떴다. 이 정도면 비행기 체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조금은 황당하고 놀라운 경험이었다.



  현지 시각  새벽 2시 정도의 암스테르담 공항은 고요했다. 면세점도 모두 문을 닫았고, 구경할만한 것들도 마땅치 않았다. 환승동으로 자리를 옮겨 겨우 찾은 곳은 24시간 운영하는 패스트푸드 가게였다. 아직 환승하기 까지 3시간이 조금 넘는 여유가 남아있었다. 퍽 오랜 시간 공복이었지만 여전히 속이 좋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음료만 한 잔 사서 시간을 보냈다. 게이트로 가기 전에 다시 한번 보안 검사를 해야 했는데, 아직 시간이 멀어 불이 꺼진 채였다. 달디 단 음료수나 쪽쪽 빨면서 와이파이를 잡아 시간을 보내다가, 보안 검사원들로 보이는 무리가 보이자마자 그 뒤를 바로 종종 따라가 1등으로 검색을 마쳤다. 낯선 장소이니만큼 미리 움직여 두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고요한 게이트 앞에서의 기다림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루하니 스킵하도록 하자. 그러니 각설하고, 그러고도 1시간을 좀 더 넘게 기다린 후 나는 런던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3/3 배열의 작은 기종이었고, 원래 내 좌석은 맨 뒷열 복도 쪽 자리였다. 2시간도 안 되는 짧은 여정이기 때문에 뭘 하기도 애매하다 싶어 등을 기대는데 한 승무원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 중간 열에 무슬림 여자가 있는데, 양 옆에 남편이 아닌 남자가 앉는 자리라 종교적인 이유로 그 자리에는 앉을 수가 없대요. 혹시 괜찮으시면 자리를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별생각 없이 그러겠노라 대답했고, 승무원과 그 무슬림 여자의 감사 인사를 수차례 받은 후 그 자리로 향했다. 그런데 웬 걸, 내가 앉게 될 자리 양 옆에 그냥 남자도 아닌 extension belt가 필요할 정도의 거구의 남성 둘이 앉아있었다. 자리에 앉아 어깨를 거의 반으로 접은 채로 나는 약간의 후회를 했지만, 그래도 양 옆의 두 사람이 상당히 신사적인 덕분에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조금 편하게 런던까지 갈 수 있었다.


  이것은 조금 뒤에 든 생각인데, 기내를 쭉 둘러보았을 때 동양인으로 보이는, 게다가 젊은 여자이기까지 한 사람은 나뿐이었는데, 승무원이 굳이 곧장 맨 뒤에 있는 내게로까지 와서 말을 걸었던 것을 떠올리며 그것이 일종의 인종차별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괘씸한 기분이 들었다.



  기체는 난기류에 끊임없이 흔들렸다. 상식적으로 순항 고도에서의 난기류는 크게 (생명에는)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감각은 불쾌하다. 나는 내심 불안해하면서도 승무원이 나누어주는 샌드위치를 받아 한 입 물었고, 거의 16시간 만에 위장에 기별을 준 덕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생에 먹어 본 샌드위치 중에 가장 맛있었다. 어쨌든 신나게 나부끼던 비행기는 런던 히드로 5 터미널에 무사히 안착했다.








“여행으로 왔다고?”


“응, 그런데 해리포터 좋아해서 그 스튜디오도 가고 싶었는데 아쉽게 티켓이 매진이라네.”


“오 저런... 유감이야. 그래도 다른 멋진 것들도 많으니, 부디 좋은 경험하고 돌아가길 바랄게.”



  깐깐하기로 소문난 런던 히드로 공항의 입국심사였지만, 생각보다 유머러스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로 진행되었고, 몇 마디 나누지도 않고 그는 “Welcome to London.”하며 내 여권에 도장을 쾅 찍어 주었다. 이것으로 한국을 떠난 지 채 하루도 안돼서 시차로는 9시간, 거리로는 8,854Km,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해가 지지 않는 석양의 나라 영국에 도착한 것이다.


  나는 그 길로 런던의 교통권인 오이스터 카드를 구입하고, 튜브를 타기 위해 이동했다. 튜브는 생각보다도 더 아담하고 어딘가 모르게 키치 한 느낌이었다. 오전 7시가 조금 넘은 시각의 공항발 튜브는 한가했고, 모두가 지친 아침을 맞이하고 있을 때에 홀로 즐기는 그 여유가 어딘가 낭만적이었다. 튜브는 지하역을 몇 번 거치더니 이내 지상을 향해 달렸고, 창밖으로는 런던 외곽의 전경이 드러났다.


  런던의 날씨는 소문부터 악명이 높았지만, 상상했던 것만큼 우울하지만은 않았다. 사실 날씨보다는 흔히 지나치며 보이는 가로수들이 좀 더 괴이했는데, 이리저리 뒤틀려 있는 데다가 이미 낙엽이 떨어진 가지들은 손톱을 뾰족하게 기른 주름진 손가락들 같은 모양새라 슬리피 할로우나 폭풍의 언덕 등을 보며 느꼈던 음산함에 가까운 스산함이 그대로 스며들어 있는 느낌이었다. 괜히 그들의 창작물에서 비슷한 감상의 우울함이 드러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 등을 하며, 나는 그렇게 창밖의 풍경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한 시간 가까이 달렸을까. 튜브는 어느새 내 목적지인 Russell Square역에 도착했다. 나는 낑낑거리며 캐리어를 들어 옮겼고, 역을 나와 런던의 지난 역사들과 현재가 조화롭게 섞여있는 거리를 돌아보며 잠시 감탄했다. 처음 만나는 런던은 갈색에 가까운 세피아빛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는 저마다 바쁜 사람들의 틈새에서 숙소를 찾기 위해 다시 한번 길을 둘러보았다. 누가 보아도 여행자의 행색이었을 터였다.



“길을 찾고 있나요?”


“아, 네. 이 호텔을 찾고 있는데 혹시 아세요?”


“이길로 내려가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나올 거예요. 아주 큰 건물이라 헷갈리지 않을 거예요.”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나에 앞서 영국 여행을 다녀왔던 친구가 “런던의 할머니들은 참 친절했어.”하고 얘기해줬는데, 그 말이 정말이었는지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중에 한 백발의 노부인이 다가와 먼저 말을 걸며 길을 알려주었다. 30초도 채 안 되는 짧은 대화였지만, 인자하게 웃는 얼굴이나 지긋한 나이 탓에 살짝 떨리는 목소리는 참 따듯했고, 그 노부인은 나에게 런던의 기분 좋은 첫인상이 되어주었다.


  그분이 알려준 대로 걸어내려 간지 얼마 안 되어 호텔에 도착했지만, 10시 이후에야 체크인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1시간 30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프런트에서는 체크인 전까지 짐방에 캐리어를 맡겨놓을 수 있다고 했고, 나는 로비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을 바에야 근처라도 다녀오는 것이 낫겠다 싶어 그의 말대로 짐을 맡겨놓은 채 이번에는 버스를 타러 나섰다. 오랜 이동으로 피곤할 법도 했지만, 그 시간의 대부분을 워낙 푹 자고 났기 때문인지 다행히 정신도 체력도 멀쩡했다. 분명 출발할 때만 해도 컨디션 난조로 골골대던 그 사람은 어딜 간 건가 싶을 정도였다. 아니 어쩌면 당장 눈 앞으로 펼쳐진 비현실을 닮은 현실에 설레는 마음이 앞서 어떤 피로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행을 할 때 아주 큰 틀과 동선만 정해놓을 뿐 굳이 계획이란 걸 하지 않는 편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냥 그때그때 마음이 동하는 대로 가자 싶어 사실 대략적인 루트도 생각해 놓지 않은 채였는데, 그렇게 충동적으로 고른 첫 행선지는 캠든 타운이었다. 펑크를 좋아한다면 한 번 꼭 들러보라는 추천에 반드시 가야겠다 싶었던 곳이었는데, 마침 거리도 멀지 않았다. 저녁에는 술과 마약을 하는 사람들로 치안이 좋지 않기 때문에 낮에 가는 편이 안전하다 하니 때마침 이른 시간이기도 하고 잘 되었다 싶었다.


  나는 길을 건너 로망 같은 빨간 버스 ‘더블 데커’를 탔고, 그 감상을 충분히 즐기기도 전에 얼마 달리지 않아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시장으로 향하는 길목 근처에는 유난히도 커다란 올세인츠 매장이 있었고, 길 안쪽으로 들어서 시장 거리로 들어가니 여러 노점과 작은 가게들이 즐비했다. 라이더 재킷과 타탄체크로 대표되는 여러 펑키한 아이템들, 짙은 스모키 화장과 피어싱을 한 가게 주인들, 앤틱 한 가구들. 주말을 갓 지난 월요일 아침이라 많은 가게는 문을 닫은 채였지만 그 모든 것이 떠난 듯한 조용한 분위기 조차 나름의 구경거리였다.



  하늘은 모처럼 맑았고, 아직 겨울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바람이 제법 쌀쌀했지만 추운 날씨는 아니었다. 인적이 드물어 어쩐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거리를 발이 닿는 대로 걸었다. 나는 이 철저한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좋았다. 누구도 나를 모르며, 나 또한 모든 것이 새롭고 처음인 이곳에서 관찰자의 시선으로 존재하는 것. 그 거리감과 낯섦이 내게 있어 여행이 매력적인 이유였다.



  나는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마음에 드는 화집을   사고, 팔랑거리는 마음으로 길가를 걷는데 마침 맥도널드가 눈에 들어왔다. 크게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와이파이도 빌려   잠시 지친 다리도    안으로 들어섰다. 무엇을 시킬까. 모든 메뉴가 맛이 없지만 치킨 레전드는 먹을만했다는 평이 생각나서  세트를 시켰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굳이    먹고 싶은 맛은 아니었다. 영국 음식들에 대한 관대하지 않은 평가들은  들어왔지만 대체적으로 평준화되었을 것이 분명한 대표적인 패스트푸드조차 이런 맛이라니. 이번 여행은 괜찮은 전시나 도록, 화집을 사는 것에 주로 경비를 쓰자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반쯤 먹다 남긴 버거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한참 다음 행선지를 고르려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내 앞으로 한 인영이 서성이기 시작했다. 눈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워 인기척을 느낀 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그 인영을 확인했다. 조금은 마른 듯한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였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준비라도 한 듯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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