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기절하듯 자다 깨보니 아침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평소에는 눈이 떠지지도 않은 시간이건만, 몸은 그저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가벼웠다. 조식 메뉴는 평범한 영국의 아침식사였고, 베이컨이나 몇 가지 메뉴는 추가 금액을 지불해야 먹을 수 있었다. 딱히 맛있어 보이지도 않는 것을 굳이 사 먹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토스트와 계란 정도로 충분히 요기를 하고 자리를 떴다.
겨울이라 그런지 아직 밖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분명히 조식을 먹고 나왔는데, 늦은 저녁 식사를 한 기분이었다.
화장을 하고, 기온에 맞게 옷을 입고 호텔을 나서 러셀 스퀘어 역에 이르렀는데, A4용지에 깨알 같은 글씨로 뭔가 써져 있고, 역문은 철창이 쳐진 채 닫혀 있었다. 글씨가 하도 작아서 눈을 찌푸리고 집중해서 읽는데, S...T...R...I... 파업! 파업이라니!
날짜를 보니 딱 오늘부터 출국 직전일까지였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집으로 돌아갈 일은 걱정이 아니지만, 기껏 튜브 노선도로 동선을 짜 놓은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이래서 계획은 미리 세워봤자 큰 의미가 없다니까.
나는 발걸음을 돌리며 급하게 버스 노선 어플을 찾았다. 다행스럽게도 피카딜리 라인만 파업일 뿐, 다른 노선은 정상 운행을 하는 것 같았다. 웨스트 민스터까지만 버스로 가면 그쪽에서 디스트릭트 라인을 타고 사우스 켄싱턴까지 이동하면 된다. 그래, 날씨도 괜찮고, 차라리 바깥 경치를 둘러보며 가기에는 버스가 나을지도 모른다. 내가 정류장에 도착하기 무섭게 내 앞에 다다른 버스에 오르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층으로 올라가 바깥이 잘 보이는 좌석에 자리하여 앉았다. 출근 시간대를 살짝 비켜간 버스는 생각보다 여유롭게 달리기 시작했다. 지나치며 보이는 트라팔가 광장에는 사람보다 비둘기가 더 많았다. 그 풍경을 보며, 나는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미안해요.”
“앗, 미안합니다.”
웨스트민스터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려 튜브로 환승하러 가는데, 의도치 않게 옆에서 같이 길을 건너던 남자의 발을 밟았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반사적으로 그쪽을 쳐다봤는데, 무척 건조한 톤이기는 했지만 오히려 내게 발을 밟힌 쪽이 먼저 Sorry, 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 퍽 문화충격이었다. 첫날에 황당한 사람들을 많이 마주쳐서, 신사의 나라는 얼어 죽을... 하고 생각했는데 이건 또 미안하고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것은 매너일까 여유일까. 둘 중 무엇이든, 나도 누군가 내게 와 실수했을 때 불쾌함이 어린 생색보다는 미안하다고 먼저 얘기할 수 있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소한 일이 어쩐지 아무래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사우스 켄싱턴에 오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오로지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 때문이었다. 이곳은 패션이나 소품, 가구 같은 문화 전시가 많은 곳인데, 사실 런던 그 어느 곳보다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행복한 일정이었다. 건물과 내부 모두 아름다웠고, 무료 전시였지만 퀄리티도 높아 눈이 즐거웠다. 그중 가장 내 마음이 설렜던 것은...
“와, 펑크 전을 지금 해요?”
“네, 이쪽으로 입장하시면 바로 특별전시구역이고 이거는 유료예요.”
“이 정도 기획전이면 그럴 가치가 있죠.”
한참 빠져있던 펑크, 그것도 내가 사랑하던 디자이너들의 레전드 작품을 한꺼번에,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다. 박물관 안의 모든 것은 사진 촬영이 가능했지만, 특별전시구역은 스케치만 가능하다는 설명을 듣고 메모지와 펜을 하나 챙겼는데, 오히려 사진으로 찍는 것보다 직접 적고 그려보는 것이 감상에 더 큰 영감을 주었다. 마침 한국으로 돌아가면 아트 워크 전시를 마무리 지어야 했는데, 이런 전설적인 디자이너들의 작품들을 한데 모아 볼 수 있는 것이 행운이고 큰 감사였다.
기대했던 만큼 좋았던 곳이었고, 기대치도 못했던 특별전 덕분에 더 만족스러웠다. 따로 굿즈는 눈에 띄는 것이 없었지만 화보집, 전시집들이 많아 몇 권 구입했다. 이번 여행은 돌아가는 캐리어가 꽤나 무거울 것 같다.
한낮의 거리는 여유로웠다. 아마 모두 각자의 일터에서 책임을 다하고 있으리라. 나는 점심시간이 이미 지나 덩달아 느슨한 분위기의 샌드위치 가게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하나 시켜서는 잠시 앉아 책을 읽는 호사를 누렸다. 창가에 앉아 겨울 햇빛을 받는 동안, 시간은 지금의 이 여유만큼이나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사실 생각해보면 어디에서든 가능한 소소한 일들이었다. 이곳이라고 특별할 것이 없는데, 특별한 이유는 내가 이곳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회의 어떤 염증도 모르는, 그저 멋진 표면에 부유하는 여행 자니까. 잔뜩 심각해 보이는 얼굴로 신문을 읽고 있는 앞 테이블의 노인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 행선지는 베이커 거리. 그 유명한 셜록 홈즈의 거리이다. 영국에 대해 특히 한 가지 굉장하다고 여기는 것이 문화 콘텐츠인데, 존재한 적도 없는 가상의 인물과 가상의 마을과 가상의 세계로 이 많은 여행자들을 유혹하고, 수많은 재화를 낳는 구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놀랍다. 도일, 크리스티, 톨킨과 루이스, 롤링, 그리고 또 수많은 창작자들. 창작물이 단순한 유희 거리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가 되는 곳. 런던 올림픽의 그 찬란했던 개막식과 폐막식을 떠올리며, 그 창작자와 창작물에 대한 존경이 있는 이곳의 문화가 새삼 부러웠다. 물론, 셜록 홈즈 박물관은 정말 별로였다. 오히려 솔직히 길가의 음반 가게나 아기자기한 아이스크림 가게, 색색깔로 칠해진 집들이 좀 더 인상 깊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역만리 한국의 나를 이 ‘동네’까지 오게 만든 유명세만으로도 이미 대단한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