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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yla Y Mar 22. 2021

안녕, 런던. (4)

열정과 현실 사이

“어, A야. 나 지금은 베이커 스트릿에 있고, 본드 스트릿 들렀다가 너 작업 끝날쯤 맞춰서 블룸즈버리로 가려고.”


-응, 언니 구경 잘하고 있어! 나 6시쯤이면 나갈 수 있을 거야.


“그래 이따 보자!”



  A는 대학 동기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학 동기였다. 내 기억으로는 2학년을 마치기 직전에 유학 준비를 하여 영국 굴지의 패션 스쿨에 입학하였다.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다는 A의 포트폴리오를 보고 감탄사를 흘렸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도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함께 들었던 것도.


  사실 1학년 초반 이후로 A와 교류는 거의 없었다. 학교 복도를 지나다 마주치면 인사하는 정도. 여대 특성상 함께 게더링 하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이렇게 먼 곳에 와서 서로가 굳이 시간을 내어 직접 얼굴을 보고 만나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새삼스럽기는 했다. 모든 것이 낯선 이곳에서 나를 아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피차 그런 처지인 것이 이유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미리 연락을 했던 것은 아니고, 어제 맥도널드에서 Facebook에 올린 게시물에 어쩌다가 서로 댓글을 달고 달다가 정해진 약속이었다. 어쨌든, 그 낯선 모든 것이 부린 마법일까. A를 만난다는 것에 있어서 어색할까 봐 드는 걱정보단 괜한 반가움이 앞섰다.



  우선은 A가 수업을 마치고 블룸즈버리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두세 시간이 남은 때였다. 나는 베이커 거리 역에서 튜브를 타고 본드 거리로 향했다. 아직 시간은 4시를 조금 넘겼을 뿐이지만 벌써 어둑어둑한 기운이 하늘에 스미기 시작했다.


  튜브 안에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그중 대개는 지쳐있는 눈가를 하고 있었다. 조금은 어둡게 내려앉은 그 눈들을 보면서, 어디든 버티는 삶은 고된 삶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각자의 목적에 따라 같은 열차 같은 칸에 타고 있는 각각의 사람들에게 떠오르는 감상은 모두 다른 것일 터였다. 누군가에겐 지친 일상의 길이지만 나에게는 설레는 여행자의 길인 것처럼. 언제나 여행자처럼 산다면 삶이 조금 더 즐거워질 수 있을까.







“카푸치노 한 잔이요.”


“이름이요?”


“Layla요.”


“L..a...y... 알았어요. 이름으로 부르면 받아가면 돼요.”



  역에서 내리자마자 커피를 한 잔 샀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움직였더니 다시 한번 카페인을 충전할 때가 된 것 같았다. 그렇게 카푸치노를 홀짝이며 창가 테이블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는데 본드 거리는 번화가의 느낌이었다. 백화점도, 상가도, 극장도 많은 사람들로 복작거리는 갈색의 거리. 어쩐지 런던은 어디를 가나 갈색빛 같은 느낌이었다.


  근처의 가게들을 조금 구경하다가 옥스퍼드 광장을 지나는 방향으로 이동하면 그렇게 오래가지 않아 블룸즈 버리에 도착할 것이다. 길은 구경거리로 가득하고, 날은 적당한 날씨에 다행스럽게도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는 않았으니 걷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길을 걷다 발견한 TOPSHOP에 꽤 많은 기대를 하고 들어갔지만 생각보다 특별할 건 없다는 생각에 흥미를 잃고 다른 가게들을 굳이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단지 지나치는 사람들이, 이질적인 거리가, 모든 것이 다른 공기가 재미있어서 그냥 그렇게 걸었다. 한적한 길에 접어들어서는 거리 양 옆으로 늘어선 아름다운 건물들을 사진으로 이리저리 찍어보기도 하고, 한쪽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swan dive의 노래들을 들으며.







“그래서...... 했잖아.”


“이거는 이렇게.......”



  블룸즈버리. 약속 장소로 잡아둔 스타벅스. 오늘 어디에서도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그러나 너무도 익숙한 말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이 근처에 한국인 유학생들이 꽤 사는 모양이었다. 나는 괜히 그 사람들을 한 번 구경하듯 흘끔 둘러보고 적당한 자리를 잡아 앉았다. 신기한 일이다. 한국에서 마주쳤다면 관심 하나 가지 않았을 존재들이 이곳에서는 그 말씨만으로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이.



  여기서도 커피를 시키면 오늘로 세 잔이나 마시게 되는 꼴이었기 때문에, 따듯한 차를 한 잔 시켰다. 30분 정도를 내내 걷다가 앉았더니 하루의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얼마 안 있어 A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스타일이 많이 바뀌고, 조금 더 마른 것 같았지만 얼굴은 그때 그대로였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잘 지냈지! 언니는 어때?”


“나야 똑같지.”


“여기서 만나니까 진짜 신기하다.”


  A는 라테를 하나 시켜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약간은 어색하고 또 약간은 수줍은 그런 미소였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왔어?”


“본드 스트릿에서 그냥 쭉 걸었어. 길이 어렵진 않더라.”


“우와, 무슨 1년 산 나보다 길을 더 잘 찾는 거 같아.”


“에이, 지도 보고 왔지 뭐....... 유학 생활은 어때? 재미있어? 뭐가 좀 많이 달라?”


“응 그냥 좀 힘들기도 한데 재미있어.”



  그렇게 말하는 A는 고된 작업으로 조금은 지친 기색도 있었지만, 예전에 학교에서 마주쳤던 그때의 얼굴보다 훨씬, 다른 종류의 생동감이 어려 있는 것 같았다.


  그 뒤로 한 시간이 조금 넘게 이어진 대화는 그렇게 색다를 것은 없는 것이었다. 오늘 나의 여행은 어땠는지, A의 수업은 어떤 내용이었는지, 런던 생활은 어떤지, 한국은 여전히 혹은 새로이 어떠한지, 서로의 근황, 옛날이야기, 요즘은 어떤 디자이너와 스타일들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우리는 서로 어떤 디자인을 하고 싶고, 어떤 것들을 하고 싶다 하는 미래의 이야기들. 그 뻔한 이야기들이 왜 그토록 즐겁고 또 설렜는지 모른다.


  어쨌든 A가 즐겁고 행복해 보여서 보기 좋았고, 나는 또 다른 동기부여와 에너지를 받은 기분이라 좋았다.



“살이 더 빠진 것 같아.”, 약간 걱정스러운 투로 내가 말했다.


“그냥 신경 쓸 것들이 많아서 그런지 계속 살이 빠지네.”


“건강이랑 잘 챙겨.”



  언제나 다시 볼 수 있을까. 이렇게 뒤를 돌면 우리는 또 각자가 익숙한 길에서 그다지 서로 공유되지 않는 삶을 살겠지만, 오늘 마음만큼은 아쉬운 마음에 말끝을 흐리며 인사를 했다. 서로 멀어지기까지 손을 흔들고, 마음으로는 많은 응원을 담아.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멀지 않았다. 날은 이미 깜깜해져 가로등에 드문드문 불이 들어와 있었다. 부쩍 차가워진 바람에 몸을 가득 움츠리며, 낯선 밤이 조금은 무서워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걸었다.


  머릿속이 많은 생각들로 가득했다. A의 확신에 찬 열정이, 그 나날의 이야기들이 참 좋았다. 테두리 밖의 사람들을 만나면 이렇게 생각지 않은 두근거림과 설렘, 의외의 동기부여를 받게 될 때가 있다. 어쩐지 방금의 만남이 어쩐지 두고두고 기억이 날 것 같았다. 잠시 그 잔향을 떠올리며, 이렇게 오늘이 지나는 것에 약간은 아쉽고, 또 약간은 설레서 괜히 입꼬리 양 끝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오늘이 지나도 내일도 멋진 하루가 올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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