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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yla Y Mar 22. 2021

안녕, 런던. (6)

'그 날씨'의 변덕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던가. 날씨가 흐리긴 했지만, 걸어가는 그 반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사이에 갑자기 이렇게나 비바람이 불어닥치리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접이식 우산 살은 엉망으로 뒤집히고, 머리 위로 한 바퀴 둘러 맨 스카프의 끝자락은 바람에 나부끼며 매섭게 나를 이리저리 내리쳤다. 뭐, 사방으로 빗방울이 날아와서 애초에 머리를 가리고 우산을 쓰는 의미가 딱히 없긴 했다. 폭우라고 하기에는 비의 재질은 분무기 같았고, 그렇다고 이슬비라고 하기에는 바람이 미친 듯이 불었다. 코미디인가 싶은 타이밍이었다.


  그냥 호텔로 돌아갈까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이 비를 맞으며 근처까지 걸어온 노력이 아쉬워 우선 일단은 걸었다. 다행인 것은 비에 젖어 축축해졌는데도 날 자체가 그리 춥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게 오분 정도를 더 걸어 킹스크로스 역에 도착한 순간 정말 놀랍게도 날이 다시 개이기 시작했다. 아니 이거 정말로 시트콤인가? 아니면 트루먼쇼? 만신창이가 된 우산을 접어 인적이 드문 쪽으로 털어내며 그렇게 생각했다. 약간 억울한 마음과 황당한 마음이 한데 뒤섞였지만 어쨌든 도착했으니 됐다.



  역 앞에 설치된 9와 3/4승강장과 반쯤 워프 된 카트의 모형에서는 다른 아시안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잔뜩 신이 난 채로 서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카트 손잡이를 꽉 붙잡고 힘껏 달려 나가는 척, 누군가는 옆에 기대서서... 다들 그 판타지 세계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한껏 연기를 하더라. 나도 일행이 있었다면 그 분위기에 편승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부탁하며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할 숫기는 없는지라 나는 사람들이 비켜선 모형물만 사진으로 담았다. 이번에도 그 앞에 서있던 안내인이 “찍어줄까?”하고 물어오는 바람에 애써 손사래를 치며.



  막상 역에 들어오니 몸이 으슬으슬했다. 어쩐지 유럽은 건물 밖보다도 건물 안이 더 냉기가 사늘하게 도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천천히 거닐며 구경을 했다면 좋았겠지만, 오늘따라 사람은 너무 많았고, 잔뜩 힘을 주고 걸어온 탓에 몸이 피곤했다. 기차를 탈 것은 아니었으니 플랫폼까지 이 인파를 뚫고 플랫폼까지 가보는 것은 상당히 귀찮을 것으로 예상. 기념품 가게에나 들러 조금 둘러보고 돌아가야겠다.


  가게는 작았지만 나름 구경거리는 되었다. 현실 안의 작은 마법 세계처럼. 비록 모든 것이 메이드 인 차이나였지만 말이다.







  생각해보면 해리포터는 내 학창 시절을 함께한 친구 같은 책이었다. 일곱 번째 이야기로 그 모든 모험이 막을 내렸을 때, 나의 어린 시절과 이별한 것 같은 씁쓸한 허전함이 한참이나 남았던 기억이 난다. 익숙한 친구 같은 이름들, 장소들, 정말로 어디선가 숨 쉬고 있을 것 같은 살아있는 이야기들.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나면 몇 번씩 다시 읽어보고, 영화도 처음부터 다시 찾아보기도 하면서 ‘그때 그 시절’ 자체를 추억할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나와 세월의 자취를 같이 밟아가는 영화의 주연이었던 세 사람을 보며 역시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새삼 느끼는 것이다. 아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한, 기묘한 양가감정이다.



  나는 역을 나와 이제 다시 호텔을 향해 걸었다. 다행히도 다시 비는 내리지 않았다. 아까는 비바람과의 사투로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왠지 스트라스부르에 있을 것 같은 색색깔 파스텔톤으로 한 채 한 채 칠해진 집의 무리 같은 것들. 오른편으로 달리는 차들과 어떤 보행자들도 지키지 않는 신호등.


 이미 그 며칠 새 익숙해진 풍경임에도 아직도 영화 속을 걷는 기분이다. 나는 걸음을 천천히 하며 좀 더 이 여행의 감각을 즐기기로 한다.








  방에 돌아오니 카드키가 작동을 하지 않는다. 당황해서 몇 번이나 다시 찔러봤지만 날 거부하는 삐빅하는 소리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나는 눈을 굴리며 다시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순식간에 현실 세계로 돌아와 퍼뜩 정신을 차린 기분이었다. 그새 더 젖었을 리 없는 라이더 재킷이 더 축축하게 느껴지는 그런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내려간 김에 샌드위치나 과일 같은 것들도 조금 사 와야겠다.



“호텔에 돌아왔더니 카드키가 작동을 안 해요.”


“아, 몇 호에 이름이 뭐죠?”


“0000호, 이름은 000예요. 스펠링이.....”


“확인했어요. 자, 여기 새 카드예요. 다시 내려오느라 고생했네요.”


“고마워요. 내려온 김에 저녁거리나 살려고요.”



  굉장히 그리스인 같은 이름과 억양을 한 직원은 웃으며 좋은 저녁 식사가 되길 바란다며 말을 맺었다. 남은 일정 동안 두 번 오르내리는 일이 다시없길 바라며 나도 슬쩍 목례하고 이번에는 TESCO로 향했다.


  별달리 한 일이 없는데도 시간이 많이 지났다. 벌써 호텔 건물 바로 옆에 있는 펍이 오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시 나온 김에 맥주 한 잔에 치킨 윙 몇 조각이나 할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얼른 샤워를 끝내고 나른하게 침대에 누워서 편한 시간을 갖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문득 스친 맥주 생각을 지우긴 어려워서 캔맥주 하나를 같이 집어 계산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문은 문제없이 잘 열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이미 창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세찬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이리저리 휘어지는 것에 비해, 두꺼운 면 재질로 된 샤워 가운은 몹시 포근해서 괜한 행복감이 들었다. 나는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 침대에 걸터앉아 마트에서 사 온 것들을 세팅하고, 아이패드를 고정해 기대어 놓고 마지막으로 캔맥주를 땄다. 경쾌한 소리가 났다.



  닥터 후 시즌 4의 마지막 두 편이 남아있었다. 예전에 봤을 때 거의 흐느껴 울면서 봤던 기억이 나는 회차였다. 10대 닥터가 I don’t want to go라는 말을 남기고 마지막 안녕을 했던. 이제 내일모레면 나도 런던을 떠나 다시 나의 익숙한 내 땅으로 돌아가겠지. 그리고 오늘의 런던은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혹은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할지조차 모르는 채로 나도 이곳에 안녕을 고할 것이다.


  어쩐지 조금은 울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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