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yla Y Mar 22. 2021

안녕, 런던. (5)

내가 좋으면 됐지.

  어제 하루 종일 밖을 쏘다녔던 것이 원인인지, 단지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일이 이렇게나 고될 수가 없었다. 겨우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암막 커튼 뒷면을 햇빛이 뜨겁게 달구고 있을 즈음이었다. 지금 막 내려가면 오믈렛 하나 정도는 먹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식욕보다는 피곤이 앞서 조금 더 누워있기로 했다.


  다시 눈을 감은 채로 잠시 오늘 하루 일정을 되새겨보았다. 신시가지, 테이트 모던, 그리고 워털루역. 하루 내내 걸어야 할 일정을 이틀 연속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잠시 끙- 소리를 내며 앓다가 결정해버렸다. 오늘은 그냥 쉬자. 원래 마지막 날에 설렁설렁 근처나 다녀오려던 계획을 오늘로 앞당겨 버리면 될 것이 아닌가. 여행이 별 건가? 내가 좋으면 됐지. 그렇게 생각하고는 다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이렇게 한 번 깨고 나면 다시 잠에 들기는 영 쉽지가 않다. 그저 조금 더 게으름을 피우며 뒹굴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쨌든 갑자기 밀려온 여유는 변함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루 종일 누워있을 수는 없으니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나름 말끔한 모습으로 호텔 방을 나섰다.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대영박물관이 있었다. 사실 내게 있어 대영박물관에 대한 인상은 약탈과 식민 지배의 상징과도 같은 느낌 정도라 그다지 꼭 가고 싶은 곳은 아니었지만, 근처에 있으니 한 번 들러 보기는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많은 것들을 다 둘러볼 마음과 체력은 여전히 없었으므로 산책하는 길에 잠깐 둘러보는 정도로 해야겠다. 그 후에는 킹스크로스 역에 들러 해리포터 덕후의 기분을 좀 느끼고 돌아와 TESCO에서 사 온 주전부리와 함께 이불속에 파묻혀 밤늦게까지 닥터 후(영국 BBC의 유서 깊은 드라마)를 즐길 것이다.


  와우, 완벽하다.








  12시에 조금 못 다다른 시각. 거리 위로는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고 있었고, 한낮의 온기를 머금은 바람과 소수의 사람들만이 거닐고 있었다. 나는 막상 숙소 근처의 풍경은 새로워서 한참을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찍었다. 건너편으로 바삐 지나가는 중절모의 노신사와 그 뒤로 드리운 그림 같은 건물이, 당장 눈으로 보고도 어쩐지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아서 홀린 듯이 또 한 장 사진으로 담아내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매일 같은 이 장면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그렇게 걷기도 얼마 지나지 않아 대영박물관 앞에 도착했다. 방금까지도 걷던 한적한 길가는 환상이었나 싶을 정도로 관광 명소답게 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나는 안내 책자 한 장만 집어 든 채로 도슨트 없이 박물관 내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오대륙을 망라하는 많은 조각상, 많은 작품, 많은 유물들. 그 수많은 역사의 흔적들. 그러나 대영박물관이라는 장엄한 이름치고 그곳에 온전히 ‘영국’의 것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교과서에서 보던 익숙한 것들을 눈으로 직접 보는 신기함은 있지만, 동시에 가해자의 전리품 꾸러미를 들여다보는 기분이라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나는 금세 흥미를 잃고 로비 벤치에 앉아 신기한 구조의 천정만 한참 둘러보다가 박물관 밖으로 나왔다.







  근처의 가게에서 커피와 요리를 시켜 간단한 요기를 했다. 오늘의 선곡은 Blur. 졸업작품을 준비할 때 노동요처럼 들었던 노래들을 재생목록에 끼워 넣었다. 컨셉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괜스럽게 낯간지러워지는 것이라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어떤 특별한 날, 특별한 기분을 만들어주는 좋은 설정값이 되어주곤 한다. 그 분위기 하나에 얼마나 많은 것이 좌우되는지. 그러니 굳이 사람 복작거리는 유명한 어딘가를 다니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렇게 조용한 음식점에서도 좋아하는 밴드의 경쾌한 멜로디와 함께, 그다지 맛은 없는 요리와 커피만으로도 런던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



  가게 주인이 추천한다던 토마토 파스타는 솔직히 싹싹 비워 없애기에는 신 맛이 강하고 참 맛이 없었지만 양은 또 놀랍도록 많았다. 유독 친절했던 주인아주머니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몇 입 먹지 못하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나마 곁들여 나온 샐러드와 감자칩은 먹을만했다. 나는 감자칩을 몇 조각 집어먹으며 그다음 행선지를 떠올렸다. 킹스크로스 역. 호그와트 여정의 시작점. 해리포터 스튜디오를 방문하지 못하니 아쉽지만 그곳이라도 갈 수 있으니 뭐.



  나는 계산을 마치고 길을 나섰다. 역은 걸어서 20분 정도 위치에 있다.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이기는 하지만 작은 우산도 챙겼고, 스카프도 챙겼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전 04화 안녕, 런던. (4)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