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구원
출국까지 딱 하루가 남았다. 어제는 유유자적 느긋한 시간을 누려버린 탓에 마지막 날의 일정이 조금 밭다. 그러나 충분히 휴식을 취해 준 덕분에 컨디션은 나쁘지 않은 듯했다. 나는 에코백에 수첩과 펜, 카메라, 휴대폰과 지갑 정도의 가벼운 짐만 꾸렸다. 오늘의 일정은 강 건너 신시가지를 스치듯 들렀다가 타워브리지를 시작으로 템즈강을 따라 워털루역까지 쭉 걸어 올라갈 계획이다. 장장 8킬로미터, 그중 반절은 내내 걷게 될 여정이었다.
고층 빌딩들은 물론 제각각의 건축학적 묘미를 담고 있겠으나, 그저 어떤 큰 도시로 대변되는 그 클리셰적인 느낌을 지우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중간중간 길가를 따라 보이는 가지각색, 갖은 문양의 그라피티들과 높은 빌딩 숲의 조화는 퍽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런던의 또 하나 아주 유명한 랜드마크인 타워브리지는 낮에도 참 아름다웠지만 밤에 봤다면 더 좋았으리라.
농산물과 식료품을 파는 버러 마켓은 어쩐지 다들 일찍 문을 닫고 있어서 슬쩍 눈으로만 훑어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캠든 타운에 갔을 때고 그렇고, 이번 여행 동안 마켓 구경과는 그다지 인연이 닿지 않는 것 같다.
다시 강가를 따라 걷는데 멀지 않은 곳에 밀레니엄 브릿지와 그 건너로는 세인트 폴 대성당이 그림처럼 드리워 있었고, 눈 앞에는 바로 셰익스피어 글로브가 보였다. 셰익스피어. 영국인들의 자부심이자 자긍심인 천재 작가. 오랜 시간 동안 즐겨하던 게임에서 셰익스피어와 그 작품을 모티브로 새롭게 챕터를 패치하며 글로브를 본떠 던전 모델링을 했다고 했는데... 오, 보니까 정말 비슷한 것 같았다.
17세기 원형극장을 본떠 다시 지었다고 하는데, 역시 ‘문화’에 대한 열정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여러 각도에서 다시 한번 둘러보고,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희극들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기도 하며 그 주변을 찬찬히 걸었다. 안쪽에서는 실제로 공연과 전시를 진행하고 있었다. 예산과 시간이 충분치 않아 더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지 못하는 것에 약간 아쉬움을 느끼며, 나는 원래 목적지였던 테이트 모던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신기하다면 신기한 것들, 나름 익숙하다면 익숙한 것들, 하나하나 기억에 남기고 싶은 것들을 렌즈에 담으며 걸었다. 길가에는 인적이 드물었고 심지어 달리는 차도 많지 않았다. 괜한 스산함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갑자기 거짓말처럼 몸에 기운이 빠지고, 어지러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이러지. 분명히 나름 가벼운 느낌으로 호텔을 나섰는데, 반나절이 채 되지 않아 몸의 모든 에너지가 고갈된 느낌이었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며칠 동안 제대로 먹은 것이 없기도 했고, 그에 비해 카페인은 너무 많이 섭취했으며, 날은 또 너무 쌀쌀한 데다가 중간중간 비도 맞지 않았던가. 나는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여기서 쓰러져버리면 생면부지의 존재들만 가득한 이곳에서는 정말 영영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정신력으로 꾸역꾸역 버텼다. 한순간에 이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니. 안 좋은 의미로 꿈속을 걷는 것 같았다.
일단 다른 생각은 됐고, 뭐라도 먹어야 될 것 같아서 주변을 둘러봤으나 당장 근처에는 손님 하나 보이지 않는 회전 초밥집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아니야, 아니다. 저기는 아니다. 아직 퍽 간절한 상태는 아니었는지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좀 더 걷기 시작했고, 쓰러지기 일보직전에 겨우 카페 하나를 발견했다. Rosie Tate라는 이름의 카페 앞에는 하늘색 스쿠터가 세워져 있었고, 간판이며 인테리어며 그 모든 것이 80년대 외국 영화에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들어가서 떨리는 손으로 사과주스와 가장 든든해 보이는 샌드위치를 계산하고는 창밖이 보이는 바 스툴 같은 곳에 기대앉았다. TV 소리가 드문드문 들렸고,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아저씨 둘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굳이 여행객이 찾을 곳은 아니었는지, 가게 주인은 갑자기 찾아와 영 힘들어 보이는 안색으로 급히 먹을 것을 주문하는 객을 조금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음식이 준비된 대로 허겁지겁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샌드위치와 사과 주스를 해치우고 나서야 똑바로 앉아 숨을 골랐다. 빠르게 뛰는 것 같았던 심장도, 힘없이 후들거리던 다리도 조금 안정이 되니 그제야 이제 살았다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십분 전만 해도 정말 이대로면 죽을지도 모르겠단 느낌이 들었던 게 괜히 웃겨서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글을 적어 내려 가는 지금까지도 그때의 느낌이 생생히 기억날 정도로 섬뜩한 경험이었다.
기운이 어느 정도 돌아오자 다시 가방을 챙겨 들고 가게를 나섰다. 갑자기 아까의 그 느낌이 또 들까 봐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지금 당장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혹시 몰라 마들렌도 두 개 더 샀으니 괜찮을 것이다.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 이제는 건너편으로 보이는 Rosie Tate 카페를 사진으로 남겼다. 이 정도면 런던에서 만난 구원자라고 누구에게 소개해도 과장이 아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