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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yla Y Mar 22. 2021

안녕, 런던. (8)

여행자의 시선

  평일 낮이었지만 테이트 모던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테이트 ‘모던’이라는 이름답게 현대 미술 작품들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그 건축물과 구조, 분위기 모든 것이 그 이름에 아주 잘 부합하는 느낌이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양한 표본의 사람들이 전시장 곳곳에 있었는데, 어떤 할아버지는 커다란 그림 앞에 이젤을 놓고 앉아 눈 앞의 그림을 자기 자신의 해석이 담긴 그림으로 재해석한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고, 젊은 남녀는 작품들에 대한 내용일지, 아님 전혀 다른 내용일지 모르지만 서로 조용히 속삭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현장 학습을 나온 어린아이들은 제각각 스케치북에 이런저런 낙서를 하고 있었다. 


  과히 정숙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왁자지껄하지도 않은 백색소음이 가득한 자리에 모두가 각자의 방식대로 작품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또 새로이 마주하는 광경이었다.



  사실 나는 현대 미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덧붙여 말하자면 ‘현대’ 또는 ‘모던’이 붙은 모든 분야에 대해 딱히 호의적이지 않다. 기존의 전통적인 것들에 대한 발상의 전환, 혹은 재해석, 혹은 재구성 같은 느낌인데, 밝음보다는 어두움에 집중한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물론 이 견해는 내 현대 예술에 대한 내 지식이 몹시 짧기 때문에 씌워진 선입견일 테다. 뭐, 감상 후에 기분이 썩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미리 그런 고정관념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테이트 모던에서의 전시들도 그 안의 작품들이 특별히 좋았는가 하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고 답하겠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말 그대로 즐기는 모든 이들의 감상 방식이 신선했고, 그 서늘한 공기가 좋았다.


  그리고 또 좋았던 점, 굿즈샵. 사진전을 마지막으로 나는 다시 1층에 위치한 굿즈샵에 들렀다.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코디북부터 도록, 예쁜 디자인의 노트와 필기구, 등등. 내가 다른 곳에서 예산을 아끼고 아껴온 보람이 있는 시간이었다.








  테이트 모던에서 셔틀 보트를 타면 테이트 브리튼에 갈 수 있다고 했지만, 살짝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나는 템즈강가를 따라 걸으며 워털루 역을 향해 이동했다. 오후에 미리 잡아둔 B와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B는 A와 같이 나의 대학 동기로, 직전에 졸업 작품 준비 위원회를 같이 운영하며 알게 되었다. 앞으로의 계획만으로도 바쁠 차에, 심지어 시차 적응도 채 되지 않았을 때에 이렇게 시간을 내준다는 것이 참 고마운 일이었다.


  여하튼, 나는 어딘가를 들르자니 모자라고 그렇다고 그저 모든 것을 스쳐 지나치기에는 지나치게 넉넉한 그 애매한 시간을 걸으며, 다시 템즈 강가를 따라 움직였다.



  워털루 역으로 향하는 길은 강변을 따라 차가운 바람이 들이칠 때도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마냥 매섭지는 않았고, 강 건너로 보이는 이국적인 배경과 길고도 끝없이 이어지는 강줄기에 탁 트인 개방감 내지는 해방감을 느꼈다. 이러니 많은 사람들이 리버뷰와 오션뷰를 선호하는 것이겠지.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한 무리의 학생들과 가족 단위로 산책을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 모든 배경을 피사체 삼아 렌즈에 담았다. 이 모든 것들이 내일이면 안녕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셔터를 누르는 손길이 괜스레 급하다.








  사실 20분이면 충분히 도착할 거리였으나, 구경거리가 끼어든 발걸음은 늦춰지기 마련이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를 이리저리 돌아보며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세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역 안에는 오밀조밀 많은 가게가 있었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약간 시간이 남은 터라, 나는 와사비에서 저녁거리를 사고 여유롭게 역 안을 조금 거닐었다. 역의 모든 곳이 붐비었지만, 그나마 구석진 카페는 조금 시끄러울지언정 그래도 자리가 몇 남아있었다. 나는 B에게 워털루 역에서 오른편 가장 구석 쪽으로 오면 스타벅스가 있다고 거기서 만나자고 페이스북 메신저를 보내고는 카푸치노를 하나 사서 반 층 위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어디든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 유동인구가 많은 역에는 참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고, 많은 억양과 낯설고 가끔은 익숙한 언어들이 뒤섞여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들을 배경음 삼아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지금껏 찍은 사진들을 한 장씩 보기도 하고, 그전에 찍어두었던 우리 집 고양이 사진을 보기도 하고, 수첩에 이것저것 끄적이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 철저한 이방인의 시간이, 그 여유가, 그 관찰자점 시점이 스멀스멀 그 기한을 다해 가는 것이 아쉬웠다. 내일 이곳을 떠난다 하더라도 내 모든 시간이 끝나는 것이 아닌데도 괜히 그랬다. 돌아가면 할 일이 많았다. 아트 워크 전시회 기획도 작품 제작도 막바지를 코앞에 두고 짬을 내서 온 여행이었기에, 어떤 적응 기간도 없이 내 몫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터였다. 팀 작업실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도 해야 하고, 졸업이 코앞이니 사회로 나갈 마음의 준비도 단단히 해야 할 것이었다.


  여행의 끝만큼이나 성큼 다가와 그 존재감을 키워내는 현실에 나는 잠시 숨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튜브 안의 잔뜩 지친 존재들을 생각했다. 여행하듯 살 수 있다면. 이 감각을 계속해서 기억할 수 있다면.



  “언니!”



  그렇게 수첩 위에 낙서를 덧 그리는 중 B가 카페 2층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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