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was fantastic.
“졸업작품전 이후로 처음인가? 완전 오랜만이다.”
“그러니까. 잘 지냈어?”
“그냥 완전 질풍노도의 시기여...”
졸업식만을 앞두고 워킹 홀리데이를 결심한 B는 바로 어제 영국에 입국한 참이라고 했다. B는 근처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스태프로 한 달 정도 일할 예정이었고, 앞으로의 계획은 본인도 모를 일이지만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아보며 지낼 것이라 했다. 우선은 영어 말하기를 좀 더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ESL센터에 등록해서 당분간 배우는 편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게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B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막연함이 한 티스푼 정도 추가된 설렘으로 들떠있었다. 도전과 새 출발이 두렵기보다는 기대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언니는 이제 한국 가면 뭐해?”
한참 그렇게 이야기하던 B는 빨대 끝으로 얼음을 뒤적거리며 물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나는 일단 전시 준비하던 거 마무리하고, 팀에서 개인 작업하는 거 계속하면서 아무래도 일을 알아볼 거 같아.”
“오, 바쁘네.”
“어쩌면 또 몇 개는 하면서 정리되겠지. 사실 내 개인 작업에 더 집중하고 싶긴 한데, 그렇게만 하기에는 현실이 하이퍼 리얼리즘 그 자체네.”
돈, 시간, 재능, 그리고 꿈. 그 모든 것이 만족되면 얼마나 좋겠냐만, 그 모든 것이 제각각 방향을 달리하여 달리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어쨌든 나는 조금은 씁쓸한 마음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친절한 설명이랄 것도 없는 많은 나열에 B는 아주 바쁘겠다며 어른 같네 라고 말해줬다.
B와는 그렇게 한두 시간 정도 좀 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이제 최소 2년, 영국에서 펼쳐질 B의 나날을 응원하고 축복하며. 나는 어깨 한쪽에는 에코백을 걸쳐 매고, 다른 손에는 와사비에서 산 음식을 담은 플라스틱 백을 달랑 들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가벼운 짐이었지만 마음은 마냥 가볍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일들을 돌아보며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B에게는 멋지다, 영어도 금방 늘 것이다, 잘 될 거라고 일단 도전해봐라, 기회는 많다는 이야기를 내내 해놓고 막상 그 이야기를 나에게 적용시키는 일은 어찌 이렇게나 어려울까. 슬쩍 자조했다.
아직 그렇게 늦은 시간이 아닌데도 어느덧 해가 완전히 졌다. 그새 해가 더 짧아진 느낌이다. 하교하는 학생들과 나란히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지난 며칠간의 메모들을 읽어보았다. 고작 며칠간의 기록이 벌써 아득히 오래 전의 것 같았다. 그만큼 많은 감상들로 가득한 시간이었다는 방증일 터다. 기록을 넘기는 마음 한편이 뿌듯했다. 분명 좋은 여행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정리했다. 며칠 새에 오히려 짐이 더 생겨버렸다. 기념품 조금과 책들. 이거 무게가 만만치 않겠다고 생각하며 혀를 찼다. 하지만 분명히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막상 다시 떠날 생각을 하니, 좀 전까지도 심난하던 마음이 평안했다. 어젯밤에 한껏 감성적인 밤을 지새워놔서인지도 모른다. 그래 이러니 저러니 어떤 걱정을 하더라도 막상 가 보면 어떻게든 걸어질 것이다. 사진들을 다시금 정리하며 이 또한 아쉬운 안녕이지만 언젠가 또 돌고 돌아서, 꼭 이곳이 아니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여행의 감각 말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순조로웠다. 날씨는 맑았고, 피카딜리 선의 파업도 끝났으며, 올 때와는 다르게 컨디션도 좋았다. 나는 런던에 도착한 날 보았던 풍경을 다시 감아 돌리듯 바라보았다. 괜히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며칠 전 느꼈던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를 기다리는 설렘 같은 것은 더 이상 없었지만, 익숙한 나의 공간을 떠올리며 오는 편안함이 마음에 가득했다. 돌아갈 곳이 있기에 여행은 아름답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공항에 도착한 나는 처음에 오이스터 카드를 받았던 곳에서 다시 카드를 반납하고 보증금을 돌려받았다. 업무를 보는 노년의 남성은 영국 여행은 어땠냐고, 나에게 좋은 곳이었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It was fantastic.”
그는 소리 내어 웃으며, 기회가 된다면 다시 올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래, 언젠가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나는 터미널 안에 있는 카페에 앉아 라테와 추로스, 그리고 초코 디핑 소스를 시켰다. 남은 현금을 다 털어버릴 참이었다. 이 얼마나 알뜰한 여행인지.
곧 있으면 내가 탈 항공편의 수속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다시 암스테르담을 거쳐 한국으로 하는 여정이었다. 갈 때는 올 때만큼 터뷸런스가 심하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마지막 조각을 바삭하고 입안에 물며 몸을 일으켰다. 옷에 조금 떨어진 설탕 가루를 털어내고, 배낭 손잡이와 캐리어를 야무지게 쥐고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주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안녕, 런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