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과적응자, 그리고 낭만주의자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 할까. 아무래도 본인 소개부터 하는 것이 낫겠지.
보통 사회에서 스스로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올해로 사회적 나이 서른둘, 생물학적 나이 서른 하나, 글로벌 에이지로는 서른이 된 낭만적인 나이의 한국 여성이다. 의류학을 전공해서 5년 전에는 여성복을 취급하는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했고, 지금은 외국에 베이스를 둔 항공사에서 객실 승무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고 싶은 일도 많고, 그만큼 대책도 없던 십 대 후반과 이십 대 초반을 지나며 내가 가장 경계했던 것은 현실과 적절한 타협을 보는 것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은 어엿한 사회 과적응자가 되고 말았다. 좋게 말하면 어른이 되었다는 증명이겠지만, 그런 스스로를 돌아보며 약간은 씁쓸하게 웃게 된다. 물론 그 사실이 마냥 싫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찌 되었든, 절대 올 것 같지 않았던, 마냥 두렵고 멀기만 했던 지금을 나는 제법 유쾌하게 즐기고 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문득 무료한 날들이 찾아오면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무엇을 잊고 있는가에 대해 반추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린 날의 치기일까, 아니면 사춘기 소녀 특유의 자의식이나 어떤 다른 무엇일까. 어떤 표현이 정확할지 며칠을 고민하던 나는 그것을 낭만이라고 칭하기로 마음먹었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낙원의 이편>을 보면, 주인공이자 화자인 에이머리가 낭만적임과 감상적임에 대해 정의하는 부분이 있는데, “감상적인 사람은 세상사가 이대로 유지될 거라고 생각하고, 낭만적인 사람은 세상사가 이대로 유지되지 않을 거라고 결사적으로 믿는다.”라는 것이 그 내용이다. 나는 곧 잘 감상적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때로는 그 마저도 아니고 매우 냉소적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기실 낭만적인 도전을 하는 것이 언제나 나를 설레게 했고, 행복하게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변화 없는 세상사라니 의미도 재미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일과 촉박한 세상의 잣대와 그 부속물인 분주함에 쫓겨 지내다가도, 이런 낭만 게이지가 바닥을 찍은 것을 확인할 때마다 이렇게 무료한 시간들을 그저 흘려보내는 것이다.
지금도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 대학시절까지의 나는 상당히 자의식 과잉의 인간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아주 지적이고 이성적이며 현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장난 삼아 일컫는 지식인 병에 걸려서 닥치는 대로 온갖 시사 잡지를 읽고, 유명한 비평가들의 영화 평론문을 읽고, 고전 소설을 읽고, 내 나름대로의 평론을 하고 생각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날이 새도록 본인만의 철학을 전개하고는 했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이 좋은 자양분이 됐으리라 생각은 하지만, 어떤 부분 상당히 작위적이었다는 점이 나를 부끄럽게 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 지식인 병이 한창 도져있는 동안 내 꿈은 글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우선 내게 문학적 감성이 썩 충분치 않다는 사실은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문학가의 꿈은 접어 두었고, 그보다는 사실과 분석을 토대로 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졸업과 동시에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갈림길에서 나는 낭만보다는 현실이 내게 더 가깝다는 사실을 아프게 배웠고, 때문에 우선은 돈을 벌고 싶었고, 그렇게 전공을 따라 내게 더 기회가 열려있었던 곳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왜 꺼냈는가 하면, 낭만에 설레고 낭만에 행복했다고 고백하는 내가 그 시간부로 낭만보다는 현실을 택하는 편이 간편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현실이라고 칭한 선택들과 그 결과들이 모두 나빴던 것은 아니다. 충분히 즐거웠고, 때로는 괴롭기도 했고, 어떤 선택을 했든 겪었을 좋은 일들과 좋지 않은 일들 가운데에서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물론 전혀 후회는 하지 않지만, 단지 가끔 찾아오는 무료한 시간 중에 아쉬운 한 가지가 생각났던 것이다. 현실을 살아간다고 해서 그저 그것에 치이면서 살아가기만 할 필요가 있는가. 연기의 애드리브나 악곡의 변주가 지루함을 달래고 신선함을 주듯이, 가끔은, 혹 그것보다 조금은 더 자주, 오래간 상자 안에 담아 놓은 채 방치했던 것들을 꺼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서론이 길었다. 길게 늘어놓았지만 위의 모든 이야기들은 내가 왜 다시 새삼스러운 도전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는지에 대한 또 하나의 프롤로그이며 동시에 오프 더 레코드인 셈이다. 썩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라 얼마나 좋은 퀄리티로 잘 이어나갈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은 없지만, 투박하게나마 스스로의 안식처를 마련하는 것에 의의를 두겠다. 하이틴 영화 주인공이 우울한 날마다 열어보는 자물쇠가 달린 비밀 일기장 마냥, 추억에 빠지고 싶은 날 기분 전환 삼아 열어 듣는 오르골처럼, 이 공간이 나에게 그런 낭만적 의미로 존재하기를 살며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