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의 시간이 너무 좋아서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일본으로 한 달 살이를 계획했다. 일본 시골에 콕 박혀서 돈이 다 떨어지는 날까지 쉬다가 오고 싶었다. 일본어는 하나도 못하지만 나는 프리랜서로 어떻게든 일본에서 살고 싶었다. 대충 계획 없이 편도행 티켓을 결제했다.
제주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연락이 왔다. 잘 있는 거냐고.
제주로 신혼여행 갔을 때 연락 왔던 그 친구다.
이혼했다고 하니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2시간 영상 통화를 하고 3시간 전화통화를 했다.
"누나 일본 가지 말고 제주도로 와"
"제주도?"
"웅. 내가 지금 집이 2개가 있거든."
"왜 집이 2개야?"
"내 친구가 준 집이 있어. 제주도는 방세 계약을 연단 위로 하거든. 그래서 1년 치 방세를 한 번에 내는데 친구가 이번에 결혼했어. 신혼집에 들어가면서 그 집을 나한테 주고 갔어. 근데 원래 거기를 에어비엔비로 하려고 했는데 누나 오면 내가 누나한테 방세 안 받고 집 비어줄게. 와서 편하게 쉬고 가."
"헐 그래도 돼?"
"응 누나 전기세 가스비 이런 거 다 걱정하지 말고 누나 짐만 갖고 와. 누나 너무 애써서 편히 쉬었으면 좋겠어"
"대박~~~~~~~"
그렇게 일본행 티켓은 제주행 티켓이 되었다. 여행 경비의 큰 부분이 숙소인데 친구가 오라 하니 가야지! 게다가 J인데!
제주 사는 J는 나의 대학교 선배다. 나는 대학을 늦게 가서 J는 나보다 2살이 어리지만 2년 선배였다. 나는 나보다 어려도 "선배님~ 맛있는 거 사주세요." 하면서 J를 편하게 대했다. J는 사회경험도 있고, 자신을 편하게 대해주는 누나가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J는 육지에 살려고 했으나 그의 어려 가정환경상 그의 고향이자 그의 어머니가 혼자 살고 계시는 제주도로 내려왔다.
그가 전해준 집은 제주 시내에 있었다. 집은 2층으로 된 복층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편지와 보일러 트는 방법, 가스레인지를 사용하는 방법 등이 쓰여있다.
"와 이게 얼마만이냐!!!!"
그와 나는 10년 동안 친구였다. 같이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죽이 척척 잘 맞는 친구. J는 연차를 쓰고 공항에 마중 나와 있었다. 은희네 해장국을 먹고 근처 카페에 가서 수다를 떨고 수목원길 야시장에 갔다.
"누나 결혼했을 때 나 너무 섭섭하더라"
"아 그랬어?ㅎㅎㅎ"
"어~ 결혼 전에 내가 연락해도 왜 받지를 않았어?"
"누나 너무 바빠서 그랬지 ㅋㅋ"
이런저런 옛날 얘기를 하다가 그에게 "어떤 남자를 만나야 하는 거냐"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가 "나?"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이거 끼 부리네? 바람둥이 새끼야ㅋㅋㅋㅋ" 라면서 주거니 받거니. 그러면서 한편으론 '내가 이혼했다고 얘가 나를 쉽게 보는 건가?'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수목원길 야시장에 놀러 온 사람들 속에 앉아 맛있는 거 먹으면서 세상 편한 얘기를 하고 예쁘고 낯선 곳에서 편안하게 수다 떨다 보니 서울에서 큰일을 겪은 사람이었던 것을 잊었다. 적당히 바람도 불고 야시장에서 파는 제주 에일 생맥주를 한통 마시니 기분도 좋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웃긴 얘기를 하니 살아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다음날 우리는 해장국을 먹고 서귀포에 갔다. J와 나 둘 다 걷는 것을 좋아해서 걷는 코스를 다녔다. 같이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이어폰을 한쪽씩 끼고 노래를 따라 부르고 웃긴 얘기들을 하면서 정말로 재밌고 좋았다. 그런데 여자의 촉이라는 게 있지 않나. J의 행동이 좀 수상했다. 원래도 자상한 편인 사람이었지만 더 자상해지고, 옷도 너무 깔끔해지고 멜로 눈알로 자꾸만 나를 쳐다봤다.
"너 지금 좀 어색하다."
"왜?"
"너 누나 책임질 거 아니면 끼 부리지 마 ㅋㅋㅋㅋ"
"어?"
"너 수상해 요즘ㅋㅋㅋㅋㅋㅋㅋ"
둘레길을 걷는데 그가 갑자기 손을 잡았다.
"뭐야?"
"대답"
"?"
"책임질 수 있는 행동만 하라며. 누나 나랑 만나"
"나 이혼했는데?"
"누나 그냥 일단 나랑 만나. 누나가 이혼한 게 무슨 상관이야. 결혼도 이혼도 누나가 선택한 것 중에 하나일 뿐이지 그게 누나는 아니잖아. 나 사실 누나 결혼했을 때 기분이 너무 이상하더라. 난 누나가 좋은 사람이란 거알아. 누나가 좋은 사람인건 사람들이 다 알아. 누나 나였어도 그런 선택을 했을 거 같아. 품어줘야겠다 생각했을 거 같아. 그 사람이 누나를 속인 거잖아. 나는 누나 전남편이라는 사람 진짜 죽이고 싶어. 어떻게 누나 같은 여자를 두고... 누나 너무 자책하지 마. 누나는 이제 정말 행복만 해야 돼. 누나가 잘못한 것도 아닌 것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나는 산방산 둘레길 어딘가에서 눈물이 터졌고 제주도가 왕왕 떠나가라 울었다. 그렇게 제주도 한 달 살기는 제주도 여러 달 살기가 되었고 제주에서 살 생각을 했다. 서울에서 오는 전화들은 받지 않았고 우울증이 다시 시작돼서 예쁜 제주도 바다를 앞에 두고 일주일 동안 누워만 있던 날도 있었지만 그 외에 모든 것은 행복했다.
제주에 있으면 아무 걱정 안 해도 되니까. 나랑 죽이 척척 맞는 J랑만 있으면 아무런 고민이 없었으니까. 서울에 있으면 나가야 하는 세금 걱정, 생계 걱정, 일자리 걱정, 근심 걱정, 만나는 사람들에게 설명할 걱정 천지였지만 제주도에 있을 때는 행복만 했으니까. 그냥 나로 존재했으니까.
제주는 나에게 너무나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하루는 제주 성산일출봉에서 보룡제과까지 걸어가는 날이 있었다. 예쁜 카페들을 지나 어떤 모레 무더기로 되어 있는 관리되지 않는 잡초가 가득한 공터를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느낌이 좀 싸했다. 그곳을 나오는 계단 앞에 43 학살 터라고 푯말이 붙어 있었다. 내가 걸어 지나온 공간이 과거의 학살터였다는 것을 알게 되자 소름이 끼쳐 소리를 질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데 예쁜 제주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참혹한 고통의 땅이었으나 이제는 사람들에게 추억과 쉼을 주는 땅이 된 제주가 되었구나. 나의 삶에도 꽃이 깃들거라 생각이 드니 큰 위로가 되었다.
드라마 <연인>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사극이다.
극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를 소개하고 싶다.
장현 : 난 그저 부인으로 족합니다. 가난한 길채, 돈 많은 길채, 발칙한 길채, 유순한 길채, 날 사랑하지 않는 길채.. 날 사랑하는 길채. 그 무엇이든 난 길채면 돼.
길채 : 좋아요. 허면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길채는?
장현 : 안아줘야지 괴로웠을 테니... 많이 힘들었지? 다 끝났소. 이제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난 이제 당신 곁에 있을 거야.
그는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 꽃을 자주 선물해 줬다. 나는 꽃을 좋아하고, 파란색을 좋아한다고 그에게 자주 말했다. 브런치를 기획할 때는 제주남자와 서울여자의 장거리 연애 시리즈물을 쓰려고 했는데 이미 이별한 사람과의 추억을 다시 생각하면 뭘 하겠는가. 8개월 후 우린 헤어졌다.
"누나는 나의 우상이야. 나는 하나님보다 누나가 더 좋아."
나는 이게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 결국은 헤어졌다. 그렇지만 그는 내 인생에서 평생 잊지 못할 고마운 사람이고 고마울 사람이다. 30대에 풋사랑을 했다. 그는 나에게 <연인>의 '장현'이다. 그는 이제 곁에 없지만 그에게서 받은 사랑은 잊지 못할 것 같다. 내가 가장 힘들던 때에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줬던 사람. 잘 지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