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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근 Oct 21. 2019

책의 미니멀리즘

책을 읽으면 좋다는 이야기를 오랫동안 들어왔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람은 책을 통해 학습하고 공부한다고 하고, 현시대에도 유명한 세계적인 그룹의 CEO인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와 마크 주커버거(페이스북) 역시 책에 대한 효용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 좋은 줄 알았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책을 보았다. 몇 가지 정해놓은 분야만 보긴 했지만 어쨌든 책을 적지 않게, 꾸준히 읽어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읽다 보니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책을 읽고 돌아섰을 때 책 내용을 까먹는 허전함을 넘어 그래서 변한 건 무엇인지 자문했을 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것이 그랬다. 내 삶은 전체적으로 보면 나아졌지만 부족한 무언가가 계속 눈에 띄었다. 그런 답답함이 하루 이틀 쌓여 점검이 필요했다.


책을 왜 읽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모든 행위가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만 의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목적이 없으면 방황하기 쉽다. 방황은 가능성을 만들지는 몰라도, 확신을 주진 않는다. 적지 않은 에세이에서 방황을 찬미하는 것도 보지만, 결국 그 방황을 깨뜨린 건 의미 있는 목적을 설정하고 나서부터다. 그전까지는 계속 방황은 방황일 뿐이다. 특정 시점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방황은 무의식에 기록된 채로 사라진다. '언젠가 꺼내쓰겠지'라고 생각하지만 글쎄, 잘 모르겠다.


책을 읽는 목적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주 쉬운 결론에 도달했다. 첫 번째로 똑똑해지기 위해, 두 번째로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였다. 즉 성공이라는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 읽은 책들을 쭉 보니 과연 관련된 서적 위주로 읽긴 했다. 소설이나 에세이보다 경제나 자기 개발서를 더 많이 보았다. 삶에 필요한 책들은 중간중간 놓지 않고 읽었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 이유 때문에 나도 별 이유 없이 계속 책을 읽었으니까. 그런데 다른 점이 발견되었다. 나는 반복해서 읽지 않았다.


학습에 필요한 공부습관으로 복습을 강조한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은 반복해서 학습시키지 않으면 대부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에 따르면 시간에 따라 기억이 남아있는 정도가 다른데, 처음에는 급속하게 떨어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울기가 점점 완만해진다는 이론이다. 학습 후 10분부터 망각이 시작되고, 1일이 지나면 70% 이상 망각하고 1달이 지나면 80% 이상 망각한다. 복습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머릿속에 잊히기 전에 재학습 하면 망각을 지연할 수 있고, 반복하면 장기기억으로 이동한다.


나는 책을 계속 바꿔가면서 봤다. 두 번 세 번 읽는 것은 체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읽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움이 되는 지식과 통찰은 새로운 책을 보면서 생긴다고 믿었다. 그래서 책을 읽은 권수는 많아졌지만 그만큼 잃어버리는 것도 많아졌다. 책을 반복해서 읽으면 지루해할 뿐이지 거기서 새로운 통찰을 얻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한 책을 통해 나의 생각이 잘못됨을 깨달았다.


나는 매일 밤 잠들기 전, 같은 책을 수십 번씩 읽는 아들에게 다른 책을 읽도록 강요한 적이 있다. 그리고 교육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우연히 알게 된 한 전문가에게 나의 우려를 털어놓았다. 그런데 전문가는 빙긋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아이들은 같은 책을 100번 반복해서 읽어도 매번 다른 상상을 해요. 오히려 반복 도서는 아이들의 창의력을 키워주죠.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도 아이들의 상상력은 훨씬 풍부하거든요. - <작고 멋진 발견>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과의 조우이다. 책 안에 새로운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읽는 내 안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독서모임에 나가면 같은 책을 읽더라도 저마다 느낌점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배경지식과 맥락의 이해가 책을 자신만의 해석으로 읽게 하기 때문이다. 책을 반복적으로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창의성이란 어떤 번뜩임이나 전에 없는 새로움이 아닌, 있었던 것을 반복하면서 이전과 다른 차이를 발견할때 번쩍인다. 새로운 것을 깨닫기 위해선 이전의 것을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한다. 다시봐도 새롭고 새롭다면 새로운 생각을 하기가 힘들다. 새로운 것을 머릿속에 주입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의 미니멀리즘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책을 읽는 시간이나 노력은 그대로 하되, 같은 책을 반복하며 읽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떠올랐던 아이디어가 휘발되지 않도록, 그리고 익숙한 문구에서 새로운 통찰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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