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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근 Nov 07. 2019

다이어트가 몸에만 필요한건 아니지

처음 카페에 신세를 질 때에는 동네의 한 카페를 딱 지정해서 매일 그곳을 들렸다. 휴일에도 특별히 할 일이 없으면 항상 갔었다. 주로 책을 보기 위해서 갔었는데 특별히 그곳의 조명이 좋아서도 아니고, 테이블이 넓은 것도 의자가 푹신한 것도 아니었다. 오랜 풍파를 이겨내서인지 곳곳에 파손되거나 녹슨 곳이 눈에 띄었고, 봄가을엔 기어가는 벌레가 보이는 곳이었다. 주황빛이 나는 전등은 그런 올드한 분위기를 더욱 실감 나게 했다. 오래 앉으면 당연히 허리에 무리가 갔고, 화장실은 그리 깨끗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굳이 여러 카페가 있는데도 그곳에 간 이유는 가격이 저렴했기 때문이고, 어느 순간부턴 관성으로 다니는 듯했다.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을 지냈다가 어느 날 그 카페가 새롭게 인테리어를 했다. 아마 주인이 바뀌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매일 마감쯤 보이던 나이 많은 사장님이 어느 날부터 안보이기 시작했으니 거의 확실해 보였다. 바뀐 인테리어는 매우 깔끔했다. 밝은 백열 LED조명에 매장 전체적으로 깨끗했다. 이전에는 심심찮게 보였던 벌레들도 이제 더는 살지 않을 거 같았다. 그러나 내 발걸음은 거기서 딱 끊겼다. 마치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난 것처럼.


그때쯤부터였던 거 같다. 이전에는 고려대상이 아니었던 조건들이 생겨났다. '의자가 푹신하면 좋겠다', '화장실이 깨끗하면 좋겠다', '음악소리가 적당하면 좋겠다'등 조건들이 하나 둘 붙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곳은 적어도 동네에선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 것이 만족되면 부족한 부분이 꼭 생겼다. 그러다 보니 점점 동네 카페보다는 메이커가 있는 카페를 선호하게 되었다. 가격은 좀 부담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조건에 평균 이상으로 부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형 카페 역시 문제는 있었다. 바로 사람이 많다는 점이었다. 내가 가기 좋은 시간대에는 당연히 자리를 잡는 게 힘들었고 그만큼 웅성거리는 소리가 컸다. 자리가 없는 날에는 왠지 맥이 탁 풀려 다른 카페를 찾기보단 그냥 집에 갔다.


시간이 갈수록 조건은 늘어갔다. 만족은 마치 통장을 거쳐 사라지는 월급처럼 초반의 감탄은 금세 사라지고 없었다. 조건이 늘어나는 만큼 불만도 늘어나고 카페를 옮겨 다녀야 할 핑계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부분 후회한다. 옮겨도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을 사귀는 것이 힘든 이유도 이것과 같은 거 아닐까? 젊을 때 더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었던 것은 젊은이라는 마법의 단어가 아니라, 조건 없이 보는 것에 있었을 거라 생각이 든다. 조건이 많아지는 만큼 나의 마음은 좁아지는 듯했다. 좁은 마음에 사람을 필터 하고 넓은 대인관계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 마음을 조절하는 것은 조명도, 실내소음도, 의자도 아닌 내 안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보다 나은 조건을 찾는 것은 본성과 같은 것이다. 기왕 먹을 저녁이라면 멋있고 근사한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고, 똑같은 집이라도 넓고 편안한 집에서 살고 싶은 건 당연한 마음이다. 그러나 행복을 느끼기 위한 조건이 많아질수록 주위에서 찾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을 놓치게 된다. 만약 내가 깨끗한 화장실을 조건에서 뺀다면, 적당한 음악 크기라는 조건을 빼면 나는 예전처럼 동네에 있는 저렴한 카페에 들리는 것도 충분히 괜찮았을 것이다. 그것들을 얼마나 무심하게 놓쳤는지 새삼 세어본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그대로 실천할 생각은 아니지만, 손 뻗으면 닿을만한 곳에 있는 행복과 만족감을 뒤돌린 내게 과연 즐거움이 남을 수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조건들을 하나씩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세상에 완벽한 조건이란 존재하지 않기에 환경과는 최소한의 기준에 적당히 타협하면서 정말 내가 필요로 하는 것에 집중하면 되니까 라고 스스로 다독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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